남편이 마실 술에 약을 타서 살해를 시도한 사건이 이달 알려져 떠들썩하다. 살인미수 혐의자가 술에 섞었다고 진술한 약물은 ‘벤조디아제핀계’ 물질. 앞서 논란이 된 ‘강북 모텔 연쇄살인범’이 범행에 쓴 성분도 이것이다.
하지만 벤조디아제핀계가 처음부터 ‘독’이었던 건 아니다. 원래는 불면증과 불안장애 완화, 경련 치료 등의 목적으로 개발됐다. 향정신성의약품인 ‘케타민’도 원래 용도와 다르게 쓰이며 오해를 받고 있다. 2023년 ‘강남 납치 살해 사건’에 쓰이면서 국내에선 범죄에 쓰이는 약물이란 오명을 얻었지만, 원래 용도는 마취제 겸 진통제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선 수많은 미군 부상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의약품 개발 분야를 연구해 온 경상대 약대 교수가 ‘약이 독이 되는 위험한 화학의 역사’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16세기 독일계 약학자 파라셀수스가 남긴 “약이 독이고, 독이 약이다. 중요한 건 양이다”라는 명언을 인용하면서 사용법에 따라 인류를 살리거나 죽였던 여러 약물을 살폈다. 프로포폴 같은 전문의약품부터 전쟁터에서 쓰이는 생화학무기,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멀미약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례를 위트 있는 문체로 다뤘다.
미국 켄터키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미국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숨진 사람은 17만여 명으로 집계됐다. 같은 시기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례(4만여 명)의 약 4배에 이른다. ‘심각한 약물 부작용’을 겪은 사람은 무려 125만 명이었다. 집집마다 상비약으로 갖추고 있는 타이레놀조차 술과 함께 먹으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니 이런 수치가 놀랍지만은 않다.
건강기능식품이 사람을 죽인 대목에선 최근 거의 맹목적으로 변한 ‘건기식 열풍’을 돌아보게 된다. 1974년 영국 런던에서 48세의 한 남성이 죽은 채 발견됐다. 검시관이 밝힌 사망 원인은 “당근 주스 중독”. 각별한 건강식품 애호가였던 그는 죽기 전 열흘간 매일 당근 주스 4L를 마셨다고 한다. 거기에다 당근에 풍부한 비타민A를 700만 단위(IU)씩 먹었다. 하버드대 기준 성인 남성의 일일 권장량(3000IU)을 터무니없이 초과한 양이다.
저자는 이처럼 약이 독이 되기도 하는 이유를 ‘오랜 세월에 걸쳐 설계된 인체 시스템의 복잡성’에서 찾는다. “섬세하고 신비한 우리 몸을 고작 수백 년에 걸친 과학의 산물로 조절해 보겠다는 게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이며 “생로병사의 흐름을 따라잡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복용해야 할 약들은 대부분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약물의 오남용을 막을 치밀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화학무기를 ‘살포’했다. 앞서 1899년 체결된 헤이그 협약의 화학무기 ‘발사’ 금지 조항을 교묘하게 피한 꼼수였다. 정교하지 못한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는 이처럼 실제 역사 속에 여럿 있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 도처에 넘쳐나는 시대, 약물로 인해 생명이 위협받는 일을 막기 위한 체계적인 제도가 더욱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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