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도(虎皮圖), 19세기, 종이에 수묵, 222 X 435 cm. 갤러리현대 제공옛 사람들은 호랑이를 악귀를 쫓는 용맹한 동물이자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 왕은 높은 벼슬에 오른 신하에게 호피를 하사했고, 털 한 올 한 올을 섬세히 그린 ‘호피도(虎皮圖)’도 유행했다. 도화서(圖畫署) 화원이 그렸을 법한 수준 높은 그림은 궐 밖 상류층에게 사랑받았다.
백성들의 그림에선 어땠을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으로 잘 알려진 까치호랑이 그림을 보면 호랑이는 공포와 위엄은 오간 데 없다. 백성을 상징하는 까치의 외침을 듣고 있는 모양새다. 둥글게 웅크린 몸과 솜털같은 털은 날카로운 발톱과 대비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피도’와 ‘까치호랑이’ 등 조선 왕실과 백성의 미학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획전이 14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했다. 과거 신분에 따라 달리 향유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전통 회화가 오늘날엔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까지 폭넓게 짚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컬처의 뿌리와 오늘날 영근 열매를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는 전시다.
쌍룡희주도(雙龍戱珠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210 X 469.2 cm. 갤러리현대 제공본관에서 열리는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 전에선 궁중 회화와 민화 27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대한제국 시절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던 용이 휘몰아치는 ‘쌍룡희주도(雙龍戱珠圖)’, 조선시대 상류층과 서민 모두에게 사랑받은 ‘책거리(冊巨里)’ 등이 전시됐다. 전통적인 십장생(十長生)에 일제강점기 유행한 봉황과 공작 도상을 더한 병풍 그림 ‘봉황공작도(鳳凰孔雀圖)’는 그 구성과 함께 크기(가로세로 713X169cm)도 인상적이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를 찾은 관람객이 ‘봉황공작도’를 살펴보고 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매화책거리(梅花冊巨里),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192 X 318.5 cm.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8폭 병풍에 그려진 19세기 후반 민화 ‘어해도(魚蟹圖)’ 역시 뇌리에 깊게 남을 작품이다. 예부터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 물고기와 게, 가재 등이 민화 특유의 과장과 해학으로 각 폭에 담겼다. 저마다 짝을 짓고서 나란히 헤엄치거나 뺨을 맞대는 모습이 통통 튀는 필치와 색깔로 표현돼 웃음을 자아낸다. 최지예 갤러리현대 디렉터는 “민화는 공간을 장식할 병풍과 족자로 많이 제작됐기에, 다채로운 문양과 명랑한 색채가 쓰였다”고 했다.
소나무 아래 도깨비 호랑이와 까치, 2026, 수제 울에 먹, 아크릴, 과슈, 울실 스티치, 158.5 X 122.5 cm. ⓒ이두원, 갤러리현대 제공
소나무 아래 도깨비 호랑이와 까치, 2026, 수제 울에 먹, 아크릴, 과슈, 울실 스티치, 158.5 X 122.5 cm. ⓒ이두원, 갤러리현대 제공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선 ‘그림으로 길을 삼는다’는 뜻의 전시 ‘화이도(畫以道)’가 이어진다. 동시대 작가 6명이 민화와 궁중 회화를 재해석한 작품 75점을 볼 수 있다. 호피도에서 착안한 김지평 작가의 ‘찬란한 껍질’, 까치호랑이를 이국적인 재료와 전통 먹으로 표현한 이두원 작가의 ‘소나무 아래 도깨비 호랑이와 까치’, 책가도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김남경 작가의 ‘비네트’ 등을 선보인다. 다음 달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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