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4번가의 연인’에서 작가 헬렌은 어렵게 구입한 소중한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정리하며 추억에 잠긴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84번가의 연인’(1987년)에서 미국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은 책을 유달리 좋아해 영국 런던에 있는 서점에까지 책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헬렌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시대 한양에 살던 중인 신분의 조수삼(1762∼1849) 역시 책을 특별히 좋아했다.
시인은 자신에게 한 대의 수레, 두 고랑 밭, 세 잔 술, 네 다리 바둑판, 오색 빛깔 붓, 여섯 줄 거문고, 일곱 자 검, 여덟 첩 병풍, 아홉 송이 영지, 열 폭 이불, 백번 갈고닦은 거울, 천년 된 소나무, 그리고 만권의 책이 있다고 했다. 이 연작시들은 숫자로 나열되어 질서정연하고 명확해 보이지만, 시인 자신의 결핍과 과거에 대한 회한들이 뒤섞여 현실과 가공의 경계가 모호하다.
각본가로도 유명한 찰리 코프먼 감독의 ‘시네도키, 뉴욕’(2008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인 극작가 케이든은 아내의 별거 통보, 어린 딸과의 이별, 건강 악화 등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케이든은 자신의 현실을 거대한 연극 세트로 만들어 재현하려고 하는데 현실과 가상이 넘나들며 혼란스러운 내면이 드러난다.
만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 시인은 자신의 경제적 궁핍을 한 편의 희극처럼 형상화한 적이 있다. 시인이 자신의 옷 주머니에게 “너는 온종일 입을 닫고 있으면서 돈은 한 푼도 없고 문드러진 종이만 가지고 있구나!”라고 놀리자, 주머니는 “공께서도 돈 한 푼 벌지 못하면서 머릿속에 종이만 몇 조각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맞받아친다. 어려운 형편에 글만 써대는 처지를 자조한 것이다(‘연상소해·聯床小諧’)
시에선 만 권 책의 존재를 의심하는 객에게 자신의 뱃속에 있다고 답해서 책이 실재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영화 제목의 시네도키란 대상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 표현하는 수사법 용어다.
시에서는 만권의 책이 시인의 정체성을 대신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매달려 삶을 바꾸고자 했지만 중인이란 신분적 한계를 벗어날 순 없었다. 과거시험용 글을 누구보다 잘 썼지만 83세가 돼서야 진사시에 합격하곤 뱃속에 시와 글이 몇백 권이나 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司馬唱榜日·사마창방일, 口呼七步詩·구호칠보시”)
내가 가진 것이란 결국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란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애당초 부귀를 타고난 이들과 어찌 같겠냐고 얼버무린 회한의 말이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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