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겨울, 한탄강 물 위를 걷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8일 14시 00분


안보관광지였던 강원도 철원은 요즘 생태관광의 중심지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한탄강 현무암 협곡길을 걷고, 철원평야에서 겨울의 진귀한 손님 두루미를 눈 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탄강 협곡 절벽에 낸 아슬아슬한 잔도인 주상절리길도 좋지만, 겨울에만 개방되는 ‘한탄강 물윗길’은 순백의 얼음과 눈이 쌓인 협곡이 스펙터클하게 다가온다. 얼음과 눈이 녹기 전에 요즘 핫한 ‘한탄강 물윗길’을 걸어보자.


메인 후보 : 겨울에만 열리는 한탄강 물윗길. 철원군 직탕폭포에서 순담계곡까지 8.5km 구간의 한탄강 협곡을 부교를 따라 걸으며 주상절리를 감상할 수 있다.

● 강물 위를 걷다

물 위를 걷는다고? 아니,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급류타기로 유명한 한탄강 물 위를 걷는 ‘한탄강 물윗길’이 열린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그저 강변을 걷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주 강원 철원 동송읍 직탕폭포에서 태봉대교, 송대소, 승일교, 고석정, 순담계곡까지 8.5km 구간의 한탄강 물윗길을 3시간 동안 걸으면서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한탄강 물윗길은 진짜로 강물 한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다. 강물 위에 뜰 수 있는 네모난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교(浮橋)가 겨울(10월말~3월말)에만 임시로 설치된 것이다. 이 부교는 봄이 오면 한탄강 수위가 올라가고 급류가 흐르기 때문에 철거된다.

그래서 한탄강 겨울의 절경을 색다른 시선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강변 양쪽 절벽의 주상절리, 기암괴석,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세찬 물소리까지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3D 아이맥스 영화같은 체험이다.

우리 말로 ‘큰 여울’을 뜻하는 한탄강(漢灘江)은 북한 평강에서 발원해 철원과 경기도 연천, 포천에 걸쳐 136km 구간에 흐른다. 한탄강은 약 54만 년 전부터 12만년 전 화산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현무암이 수만년간 침식돼 만들어진 깊은 협곡을 따라 흐른다.
얼어붙은 한탄강 위를 걸으니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갈대밭 너머 꽁꽁언 강물 위로 쨍한 햇볕이 내려쬔다. 눈이 쌓인 강물 위에는 짐승의 발자국만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얼음장 밑으로 급류가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은 건너가기 힘들다. 급류는 바위에 부딛쳐 파도로 부서시고, 추운날씨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물보라는 크리스탈 왕관같은 고드름을 만들어낸다.

한탄강 급류의 물보라가 얼어 고드름이 맺혔다.
철원군 동송읍 직탕폭포에서 물윗길을 시작했다.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로 불리는 폭포다. 세로로 긴 다른 폭포와 달리 직탕폭포는 가로가 80m가 넘는 강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높이는 3m에 불과하지만 장관이다. 한탄강 본류의 현무암 바닥이 침식으로 꺼져 생긴 계단식 폭포로 시원하게 물이 쏟아지는 모습은 영락없이 나이아가라를 닮았다. 물소리가 들리는 주변 식당에선 한탄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끓이는 잡어 매운탕 맛도 일품이다.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로 불리는 한탄강 직탕폭포.
직탕폭포
물윗길은 태봉대교를 지나 송대소로 이어진다. 송대소는 높이 30~40m에 이르는 주상절리의 명소다. 한탄강은 용암이 식으면서 육각 기둥모양으로 쪼개지는 주상절리(柱狀節理)와 널빤지 모양으로 쪼개져 시루떡처럼 수평으로 쌓이는 판상절리(板狀節理)가 잘 발달돼 있다.

부채꼴모양의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는 송대소.
송대소는 한탄강의 맑은 물이 수심 30m 이상으로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 곳. 멀리 횃불전망대와 은하수교를 배경으로 송대소의 주상절리가 화려한 왕관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 육각형 현무암 주상절리 기둥은 보석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노란색으로 빛나는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내려꽂혀 있는 절벽은 마치 빈센트 반고흐의 유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인 붓질을 연상케한다.

남북한이 번갈아 지으며 완성한 한탄강 승일교.
마당바위에서 1000원짜리 인스턴트커피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빙벽폭포를 지나 승일교까지 걸어간다.

마당바위 휴게소.

러시아나 동유럽 어딘가에서 만날 법한 아치형 콘크리트 다리인 승일교엔 치열한 현대사가 담겨 있다. 1948년 공산치하였던 철원에 북한이 절반 정도의 다리를 건설하다가 1950년 6.25 전쟁으로 중단됐다. 전쟁의 끝무렵 남한이 나머지 절반을 지어 1958년 준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 자와 김일성의 ‘일(日)’ 자를 합쳐 승일교(承日橋)로 불렀다는 설,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박승일 장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내려온다.
한탄강 협곡엔 정자가 많다. 그 중에 고석정(孤石亭)은 철원 제일의 명승지다. 강 한복판에 섬처럼 외롭게 서 있는 높이 약 15m 바위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임꺽정이 은신했다는 한탄강 고석정 바위.

고석정이 유명해진 까닭은 조선시대 명종 때 의적 임꺽정(林巨正)이 은신하던 활동하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높이 쌓고 산성 본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 곳을 통과해 조성에 상납하는 조공물을 탈취해 빈민을 구제해 의적으로 불렸다. 강 중앙에 있는 15m 높이의 고석바위에는 임꺽정이 은신했다는 자연석실로 보이는 구멍이 있고, 건너편에는 석성이 남아 있다.

용암바위들이 널빤지처럼 굳은 판상절리가 발달한 순담계곡.
고석정부터 순담계곡까지는 널빤지나 떡시루 모양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판상절리(板狀節理)가 장관을 이룬다. 순담계곡에는 수십만년 동안 흘러간 강물에 의해 조각된 기묘한 모양의 화강암들이 1km이상 펼쳐진다. 화강암 바위가 고래처럼 입을 벌리고, 그 앞에 수많은 돌들이 물고기마냥 튀어오르고 있다.

고래와 물고기 모양의 화강암이 많은 순담계곡.

계곡의 바위 밑에는 오리가 부지런히 자맥질을 하며 먹이를 찾는다. 주변 나뭇가지를 보니 솜털이 보슬보슬한 새순이 달려 있다. 한탄강엔 아직 눈과 얼음이 가득한데, 봄의 기운은 막을 수 없나보다.

한탄강 물윗길을 걷기 시작한지 3시간 여 만에 순담계곡 종착점에 드디어 도착했다. 맞은편 절벽을 보니 ‘한탄강 주상절리길’ 안내판이 보인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철원 뿐 아니라 포천, 연천까지 총 119km에 이른다.

한탄강 태봉대교 아래로 지나가는 물윗길.
물윗길을 걸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절벽 잔도’ ‘구름다리’와 ‘부교길’(물윗길)이 어떤게 더 친환경적일까 생각해보았다. 왜냐하면 강 한가운데 부교가 설치된 것이 처음엔 좀 눈에 거슬리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물 위에 떠 있는 부교는 추운 겨울 한계절만 운영되고 철거되는 임시 구조물로, 언제든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반면에 전국 지자체에서는 유행 중인 구름다리, 출렁다리, 잔도(데크길)는 수백억에 이르는 엄청난 예산과 환경을 영구히 손상시키는 작업이다. 또한 출렁다리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개성을 잃는 측면도 있다.

서태지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철원 노동당사.

● 두루미를 보며 평화를 얻다

강원도 철원하면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스산해지고, 추워지는 곳이다. 남침용 땅굴이 있고,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는 녹이 슬어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외치고 있고, 서태지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동당사’는 동유럽 어디선가 무너져 내린 장벽처럼 서 있다. 쏟아지는 포격에 산비탈과 병사들이 그야말로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 백마의 흰 살결처럼 하얗게 변했다는 백마고지 등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던 6.25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철원평야의 추수가 끝난 논에서 만난 두루미. 두루미는 항상 쌍으로 다닌다.
그런데 철원 평야에서 벼를 베고 난 황량한 논두렁에서 뭔가를 주워먹고 있는 두루미 한쌍을 발견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고고하게 긴 다리, 날개 끝에 검은색 무늬, 정수리에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 고귀한 자태의 단정학(丹頂鶴)이다. 가을 추수가 끝난 뒤 낙곡이 풍부한 DMZ 민통선 내부의 철원의 논과 저수지에는 평화롭고 포근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두루미와 재두루미, 독수리, 오리떼들이 많다.

두루미떼를 본격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두루미평화타운에서 시작해서 DMZ내 마을의 논길을 버스를 타고 해설사와 함께 견학하는 탐조프로그램이다. 하루 2회(오전 10시, 오후 2시) 선착순으로 현장접수하는 프로그램이다.

철원 이길리 한탄강 탐조대에서 만난 겨울의 진객 두루미 떼. 김영호 작가 제공
그러나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철원 동송읍 이길리 383번지에 있는 이길리(한탄강) 탐조대를 찾아가면 예약이 없이도 두루미떼를 볼 수 있다. 입구부터 수천마리의 새소리가 시끌시끌하다.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가니 전면이 뚫려 있는 방이 나왔다. 강변 모래톱에서 주민들이 제공해준 먹이를 먹고 있는 두루미떼의 장엄한 광경이 펼쳐진다. VIP전용석에 앉아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옆에는 대포처럼 생긴 600mm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는 김영호 사진작가를 만났다. 그는 “평생 철원의 두루미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두루미떼가 겨울을 보내는 철원 이길리 한탄강 탐조대 앞 모래톱. 김영호 작가 제공
세상은 전쟁과 갈등으로 시끄러운데 DMZ의 새들은 두루미도, 독수리도, 오리떼도 모두 평화롭게 먹이를 먹고 있다. 이 곳에서만큼은 분단도, 전쟁도, 빈부격차도 없는 세상이다. 연초에 두루미를 보면 행운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삼천갑자 동방삭~ 거북이와 두루미~’라는 노래에서 나오듯이 두루미는 장수를 상징하는 새다. 보통은 80년을 살고, 장수하는 두루미는 90년을 산다고 한다. 날아오를 때 꼭 2마리가 함께 비행하는 두루미는 평생 한 쌍의 부부가 해로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년해로다.

철원평야 너머로 지닌 태양을 배경으로 날고 있는 두루미.
두루미는 전세계적으로 2만여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두루미는 시베리아 일대가 혹한기에 접어들면 비교적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 철원평야, 순천만, 천수만 등지에서 겨울을 난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는 3월이 되면 다시 고향인 시베리아로 돌아가 번식을 하게 된다. 연초에 두루미를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서 신년엽서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두루미다. 겨울이 가기 전에 철원평야에서 두루미의 고귀한 자태를 한번 만나보시기를.

#전승훈의 아트로드#아트로드#철원#한탄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