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라운지로 변신한 오목공원 회랑의 마법[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11일 12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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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공원 리모델링 한 박승진 조경 건축가 인터뷰

서울 양천구 목동 오목공원에서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로사이 대표를 만났다. 30여 년 된 오목공원은 그의 리모델링 설계를 거쳐 ‘도시형 공공 라운지’로 다시 태어났다. 김선미 기자
서울 양천구 목동 오목공원에 갔던 건 오후 네 시쯤이었다. 35년 된 이 공원은 최근 리모델링 되면서 가로·세로 50m, 폭 8m, 높이 3.7m의 정사각형 회랑이 생겨났다. 그 회랑 위를 산책하는 느낌이 꽤 신선하다.

회랑 위에는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남학생이 등받이가 있는 1인용 의자에 앉아 회랑이 둘러싼 잔디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민들이 의자에 앉아 호수나 분수를 바라보며 쉬는 유럽의 공원들이 생각났다. 시선의 향방이 중요한가. 우리가 공원에서 바라는 건 부대낀 마음을 고요하게 내려놓는 일일 것이다.

기존 숲은 그대로 두고 중앙에 정사각형 회랑을 설치한 오목공원.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새 단장 된 오목공원의 의자는 가벼워서 쉽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공원에서 마음껏 의자를 움직여 쉴 자리를 잡는 건 엄청난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게다가 이 의자는 편안하게 몸을 파묻을 수도 있다. 롱 패딩을 입고 있던 그 학생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했던 것일까. 부디 편안한 마음을 얻으셨기를….

●“사람을 생각하니 회랑이었다”
이 공원을 변신시킨 ‘회랑의 마법사’를 만났다.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로사이(loci) 대표(59)다.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인 정영선 조경설계 서안 대표와 함께 아모레퍼시픽의 서울 본사와 경기 오산 원료식물원, 서울 아산병원, 대구 사유원 등의 경관을 만들었던,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조경가 중 한 명이다. 오목공원 리모델링은 그의 첫 공원 프로젝트였다.

곳곳에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을 둬서 시민들이 마음껏 머물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 오목공원.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그를 만나기 전에 이전 조경작업들에 대해 질문하느라 통화한 적이 있다. 으스댐이나 꾸밈없이 나지막하게 설명하는 태도가 잘 깎은 단정한 연필 느낌이었다. 만나보니 그 느낌이 다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아버지(고 박원근 전 경인일보 부사장)가 동아일보 수습기자 1기 출신의 사회부장을 지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목공원에는 몸을 편하게 파묻을 수 있는 의자들이 비치돼 있다.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어떻게 회랑을 생각해낸 걸까. 그는 2021년 어느 날 서울 양천구청 온수진 공원녹지과장으로부터 느닷없이 연락을 받았다. 오목공원 리모델링 운영위원회가 지명공모를 결정하면서 그의 참여를 부탁한 것이다. 다른 프로젝트들로 바쁘던 박 대표는 “며칠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현장을 방문해봤다. ‘힌트가 잡히면 지명공모에 참여하고, 영 오리무중이면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그가 처음 와 본 오목공원은 어릴 적 부모님과 살던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단독주택 마당을 떠올리게 했다. “제가 화곡동에 살 당시에는 강서구, 양천구 구분도 없을 때였어요. 왠지 목동이 낯설지 않더라고요. 저희 화곡동 집은 대지 100평에 건물은 20평이 채 안 되고 나머지는 마당이었어요. 아버지가 아들 셋을 마당에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이런저런 꽃들을 심으셨습니다.”

2015년 경남 클레이아크김해 미술관에서 진행됐던 박승진 조경 건축가의 작가정원 프로젝트 ‘아버지의 정원’ .

공원 프로젝트는 의미가 있지만, 리모델링이란 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새롭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제법 내린 비가 그의 마음을 오목공원으로 이끌게 된다. “햇볕을 가리는 오두막 같은 데에서 장기를 두던 할아버지들이 비가 들이치니까 허겁지겁 떠나더라고요. 갑자기 공원이 휑해졌어요. 사람들이 공원에서 마음껏 머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온 오목공원 리모델링 콘셉트가 ‘어반 퍼블릭 라운지(Urban public lounge·도시의 공공 라운지)’였다. 로비는 서서 떠도는 공간이지만 라운지는 편하게 앉아서 차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다. 그렇게 도시인이 행복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상정하고 김희정 모스건축사사무소 대표와 회랑을 설계했다.

높이 3.7m의 회랑 위를 산책하면 오래된 나무들을 눈 높이에서 볼 수 있다. 의자에 앉아 잔디마당을 내려다보며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지명공모에 부탁을 받고 참여한 거니까 오히려 떨어져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과격한 방안을 낸 것 같아요. 과격하다는 건, 오래된 공원에 회랑이라는 건축물을 새로 넣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전통적으로 조경은 녹지 위주이고 기껏해야 정자 같은 시설을 배치하는 정도로 여겨졌거든요. 그런 기존 문법을 벗어나 회랑의 2층도 산책할 수 있게 하고, 공원의 가구도 고급으로 넣자고 했는데 덜컥 공모에 당선됐어요.”

‘양천 비체나라’ 축제가 열리고 있는 오목공원의 겨울정원 모습. 김선미 기자

이 지점에서 서울 양천구청 온수진 공원녹지과장의 말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목공원의 변신은 박 대표가 3년 전 지명공모에서 발표한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게 구현됐다. 조경학도 출신으로 ‘2050년 공원을 상상하다’와 ‘공원주의자’ 책을 펴낸 온 과장의 말을 나중에 따로 들어봤다.

“오목공원 지명공모 할 때 위원회 내부에서 가급적 원로 말고 중견 조경가에게 맡겨보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요즘 최고 인기인 박 대표님이 승낙을 안 하실 것 같아서 제가 직접 전화를 드렸던 것입니다. 저희가 한 일은 그저 최대한 설계자의 의도대로 조성되게 한 것뿐입니다. 양천구 입장에서는 박 대표님의 첫 공원 작품을 맞게 되어 영광입니다.”

●“없애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남긴다”
이제 오목공원에서는 비가 내린다고 쫓기듯 공원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회랑에서 공원을 바라보며 느끼면 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계절의 감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오목공원의 회랑에서는 눈 내리는 잔디마당도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다. 서울 양천구청 온수진 공원녹지과장 제공

“맛있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 카페, 꽃집, 서점을 회랑 안에 들였으면 했는데 상업 시설이라 주변 상권과 부딪히더라고요. 대신 식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오목공원이 리모델링 한다니까 ‘스타벅스’와 ‘쉐이크쉑 버거’가 발 빠르게 공원 앞에 문을 열더라고요(웃음). 하긴 미국 쉐이크쉑 버거 본점도 뉴욕의 공원인 ‘메디슨 스퀘어 파크’ 안에서 시작했네요.”

오목공원은 지난해 12월22일 정식개장했다. 사진은 부분개장했던 지난해 9월 모습.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캐나다 도시계획 전문가 찰스 몽고메리가 썼던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라는 책이 떠오른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도심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위로하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는 카페, 박물관, 원형극장이 어우러져 사람들을 광장에 머물게 한다. 17세기 초에 건립돼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인 보주 광장은 처음부터 도시의 거실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지금도 잔디와 분수, 광장을 둘러싼 카페들이 도시인의 행복한 머무름을 유도한다.

박 대표는 의견을 더한다. “목동만 해도 도시의 편의시설들이 많은 지역이잖아요. 원룸주택이 많거나 소외된 동네에 더 많은 공원과 녹지가 필요합니다.”

오래된 나무들 밑에 관목과 초본류를 섞어 심어 숲을 풍성하게 보충한 오목공원 조경. 김선미 기자

오목공원은 30년 넘은 공원이라 높이 10m가 넘는 나무들이 많다. 하지만 그 나무들 밑은 썰렁했다. 오랫동안 공원에 쉴만한 그늘이 없어 사람들이 나무 밑으로 몰렸었고, 키 큰 나무의 잎들이 햇빛을 가려 다른 식물들이 자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조경 원칙은 “없애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남긴다”이다. 예전의 공원 돌담도 그대로 뒀다. 기존의 나무들은 남겨두고 팥배나무, 산딸나무, 황매화 같은 중간 키의 나무들과 맥문동 같은 초본류를 심어 숲을 다양한 층으로 구현했다. 이렇게 되면 숲의 밀도가 높아지고, 단위 면적당 배출 산소도 많아지게 된다.

●창조적 활용이 기대되는 네모난 공간
박 대표와 회랑에 의자를 나란히 두고 앉아 안쪽의 잔디마당을 바라보았다. 회랑은 바깥의 숲과 내부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부가 40cm 낮아 굳이 의자에 앉지 않아도 회랑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걸터앉을 수 있다. 실제로 점심시간 때 인근 회사원들이 그렇게 공원을 이용한다고 한다. 도시의 숲속 라운지는 밤에 또 얼마나 로맨틱할까. 비어있는 그 네모난 공간이 굉장히 창조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장소란 사실을 알게 됐다.

회랑 안쪽 잔디마당에서는 시민들이 야외 활동을 벌인다.

“제가 상상했던 쓰임새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 공연이었어요. 사람들이 여기 앉아 감상할 수도 있고 회랑 위에 올라가서 볼 수도 있고요. 벼룩시장을 열어 공원이 지역사회 사람들을 모으는 기능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도시의 라운지 정원을 표방한 곳이니까 이 구조물을 잘 활용하면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날이 춥지만, 이제 곧 꽃 피는 봄이 오면 그 공간이 사람들의 어떤 일상으로 채워질지 기대가 되었다.

밤이 깊게 내린 오목공원. 박승진 조경 건축가 제공

박 대표가 헤어지면서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이라는 비매품 책을 건넸다. 2007년부터 10년간의 작업을 글과 사진으로 담은 책이었다. 천천히 탐독한 그의 글은 깊은 사유에 기반해 간결하고도 단단했다.

이 책에는 2015년 경남 클레이아크김해 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작가정원 프로젝트 ‘아버지의 정원’도 실려 있다. 어릴 적 화곡동에 살았던 아버지의 정원을 소박하게 구현했던 작업이다.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오목공원에 사람들이 모여 꿈을 꾸고 희망을 품을 때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가 대견해 하실 것 같다고. ‘사람’을 생각하며 오래된 공원을 ‘숲이 있는 도시형 공공 라운지’로 바꾼 어느 조경 건축가의 꿈은 그 옛날 아버지의 정원에 핀 꽃과 풀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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