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시작과 끝엔 모두 빛이 있었다”…우리가 몰랐던 중세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1일 0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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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경 어느 날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한 성당에 장인들이 모여드는 장면으로 책은 시작된다. 로마 황제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388~450)의 명령으로 예배당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장인들은 예배당 천장에 불후의 걸작을 남긴다. 청금석 타일로 채운 푸른 바탕에 금빛 유리 조각들을 덧붙인 천장은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난다. 이 빛은 900년 가량 흐른 14세기 초 피렌체의 파벌 싸움으로 라벤나에 망명해온 시인 단테(1265~1321)에게 닿는다. 책은 라벤나의 한 성당 천장 아래서 ‘신곡’을 써내려가는 단테의 모습으로 끝난다.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의 천장. 5세기 초 로마 황제의 여동생이었던 갈라 플라키디아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푸른 청금석에 금빛 유리 조각을 붙인 천장은 어두운 밤하늘을 별빛으로 밝히는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까치 제공

신간 ‘빛의 시대, 중세’(까치)가 규정하는 중세의 시작과 끝엔 모두 빛이 있다. 저자인 미국 버지니아공과대 중세학과 교수 매슈 게이브리얼과 미네소타대 역사학과 수석 지도교수 데이비드 M. 페리는 서구의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시각에 도전한다. 유럽 대륙 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르는 폭넓은 시공간을 아우르며 문화와 종교, 사상, 그리고 사람들이 부딪히고 격동하는 중세의 복잡성을 조명했다. 그 바탕엔 서구 사학계가 그동안 중세를 획일화된 시선으로 잘못 바라봤다는 자성이 깔려 있다.

고대부터 이어진 철학학교였던 아테네 학당의 지식은 중세에도 이어졌다. 두 저자는 현대 역사가들이 ‘암흑기의 도래’라고 평해왔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의 아테네 학당 폐쇄 사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학당 폐쇄 이후에도 지식은 단절되지 않고 활용돼왔다는 것.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 체계를 받아들인 ‘로마법 대전’을 완성시켰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루스를 발탁해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 성당을 지었다. 그리스어로 ‘지혜’란 뜻을 가진 이 성당의 거대한 돔은 약 1000년 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재건될 때까지 가장 컸다.

6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 내부. 거대한 돔은 약 1000년 뒤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재건될 때까지 가장 컸다. 까치 제공

기독교를 획일적인 종교로 바라보는 시선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일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중세 동로마 제국 전역에 분포한 기독교 종파 중 하나였다.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7년 브리타니아 섬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파견하는 한 수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신교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성수로 정화하고, 원래 주민들이 행하던 종교 의식을 없애지 말라고 당부했다. 두 저자는 이를 통해 중세 기독교가 다양성을 배척하는 고립된 종교가 아니었으며, 당대 기독교는 ‘복수형’으로 존재했음을 조명한다.

중세사 서술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던 여성의 이야기도 담았다. 독일 중서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힐데가르트(1098∼1179)가 대표적이다. 1113년 수녀가 된 힐데가르트는 꿈에서 체험한 신의 계시를 글과 그림으로 남겼을 뿐 아니라 당대 황제와 교황, 각계각층의 저명인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적 조언도 했다. 두 저자는 “단순한 간언이 아닌 왕국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강력한 조언이었다”고 평했다.

‘맹신’ 혹은 ‘암흑’이란 단어로 수식돼 온 중세에 대한 편견에 균열을 내는 책이다. 두 저자는 중세를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시각을 바꾸면 다른 이야기들에선 소외되던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어딘가에서 시작하면 또 다른 세계들을 엿볼 수 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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