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얼어 죽을 계획이었으나 살아 돌아왔다”… 러 여행기 펴낸 이묵돌 작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5일 10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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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묵돌 작가가 러시아에서 여행 중 털모자를 쓴 모습. 본인 제공

“도망치고 싶어요. 기왕이면 아주 먼 곳으로요.”

지난해 초 이묵돌 작가(필명·29)는 자신에게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2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도 경유지도 정하지 않았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공들여 쓴 유서도 남겼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낯선 택시기사에게 사기를 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 격리됐다.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처럼 이름 낯선 도시를 거치며 별별 사람을 만났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로로 핀란드 헬싱키에 간 뒤 비행기를 타고 급히 귀국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의 이야기다.

‘여로’ 표지. 김영사 제공
‘여로’ 표지. 김영사 제공

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한국에 돌아왔다. 약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젊은 사람이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하면 보통 삶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 살 이유가 없어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그의 독특한 글은 인기를 끌어 페이스북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

“먹고 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왜 시베리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흔적도, 살아갈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8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만난 이묵돌 작가. 장승윤기자 tomato99@donga.com

죽음을 찾아 떠난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는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남성 안드레이가 제게 ‘더 배워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땐 인생의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훈계하는 안드레이의 태도가 싫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죠. 결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이묵돌 작가가 러시아 여행 중 찍은 한 기차역의 모습. 본인 제공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모두가 동경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

8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만난 이묵돌 작가. 장승윤기자 tomato99@donga.com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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