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소리, 헌옷더미, 흐릿한 사진…죽음을 이야기하던 작가의 흔적

부산=김태언 기자 입력 2021-10-20 13:39수정 2021-10-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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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소: 카나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작품.
올해 5월, 전시 제목을 의논하던 한국인 큐레이터에게 프랑스 작가는 ‘4분의 4’를 제안했다. “지금 나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다”면서 말이다. 큐레이터는 “한국에서는 숫자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 기피한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되레 더 흥미로워했다.

두 달이 지난 올해 7월, 작가는 갑작스레 눈을 감았다.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1944~2021)의 첫 유고전을 담당한 양은진 큐레이터는 “그때는 장난인 줄 알고 웃어 넘겼는데 볼탕스키는 어렴풋이 죽음을 인지했던 것 같다”고 했다.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세계 첫 유고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전시하려던 작품 또한 총 44점이었다. 날개 달린 천사 조각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설치 작품 ‘천사’(1984년)는 작가가 직접 들고 올 예정이었다. 작가의 사망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43점이 진열됐다. 작가는 별세 직전까지 1년간 작품 선정, 공간 디자인까지 모두 맡았다. 양 큐레이터는 “1점은 작가님 영혼이 채워주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볼탕스키는 일평생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에서 해방된 직후 유년기를 보냈다.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겪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소외를 경험했다. 작가가 그 두려움에 저항한 방식은 ‘기억’이었다. 잊히는 것을 겁나 한 작가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을 주목했다. 제단이나 종교적 형태 구조물 위에 얼굴 사진을 걸어놓은 작품 ‘기념비’(1986년), 반투명 커튼에 영정사진처럼 93명 얼굴을 각각 인쇄해 놓은 작품 ‘인간’(2011년) 등은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용된 사진은 실제 수용소 희생자가 아닌 신문 부고나 단체 학급 사진 등이다. 사진을 통해 사적인 기억과 역사를 이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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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소-퓨림 축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작품.
5개 공간으로 나누어 작품을 배열한 이번 전시는 대형 공간에 작품을 쏟아내는 작가의 이전 전시 방식에 비해 웅장함은 부족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장소에 맞게 가변크기로 제작됐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전시장 한쪽 벽면 가득 옷이 늘어져있는 설치 작품 ‘저장소: 카나다’(1988년)는 프로덕션 팀 ‘에바스튜디오’의 자문 하에 한국의 중고 옷 1t을 공수해 재제작했다. 익명의 옷가지들은 사라진 생명이 ‘살았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개성도 추억도 없는, 죽음 자체를 대변하는 700kg가량의 검은 옷더미 ‘탄광’(2015년)과 165일의 전시 동안 매일 하나씩 꺼지며 흘러가는 시간을 가시화한 ‘황혼’(2015년) 등도 마찬가지다.

<황혼>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작품.
재제작 작품은 매 전시가 끝난 후 폐기된다. 흔적을 중시하는 그가 작품의 자취를 손수 지운다는 것이 의문일 수 있다. 그는 “오브제는 파괴되더라도 오브제가 있었다는 희미한 기억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왔다. 작품은 물질적으로 한계가 있지만, 구전으로 계승되는 것은 신화처럼 대를 이어가며 남는다. 일본 테시마 섬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그는 2008년부터 전 세계인의 심장박동 소리를 수집했다. 설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에 끌려서라도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작품이 기억되고 이어지길 바란 것이다.

삶과 죽음을 다루지만 인간 볼탕스키는 “미술가는 삶을 유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왔던 것처럼 재치있었다. 양은진 큐레이터는 “볼탕스키는 어떤 전시건 전시 이틀 전에 전면 취소하자며 큐레이터들을 당황시켰다고 한다. 이유는 ‘이 지역에 유명한 스시집이 있던데 그걸 못 먹어서’ 따위다”라고 했다. 이 때문인지 그와 10년 넘게 일해 온 프로덕션 팀원 2명은 이번 전시로 내한한 내내 울었다고 한다. 볼탕스키가 전시장 어디쯤에 앉아있고, 어떤 대사를 할지 가장 잘 알았던 사이였기에 그의 부재가 컸던 것이다. 볼탕스키는 예술가로서의 모습만 기억할 수 있도록 팀원에게 죽음에 가까워졌을 즈음 자신의 공간에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심장>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작품.
“죽음이란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가는 것”이라던 볼탕스키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생전 녹음된 그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두운 공간을 메우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에서, 누군가의 헌옷더미 속에서, 과거 인물의 흐릿한 사진 속에서 관객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 가까이 머물고 있는 죽음의 존재를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무료.

부산=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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