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날 술이 익어가는 소리들으며 보쌈 한점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일 12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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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곧잘 하는 일이 있다. 큰 냄비에 대추 한주먹과 물을 가득 넣고 꺼질 듯 말듯 약한 불에서 뭉근히 끓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청소를 하든 책을 읽든 다른 일에 몰두한다. 1시간이 지나면 대추의 단내가 집안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몇 시간 걸리는 대추차를 끓이다 보면 차를 얻는 것보다 마치 느긋해지는 시간을 버는 것 같다.

대추차를 닮은 사업가 김태영 대표를 만난 건 10여 년 전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수불’이라는 식당을 하는 30대 초반의 젊은 사장이었다. 처음엔 목 좋은 곳에 그럴듯한 식당을 쉽게 차린, 형편 좋은 젊은이로 여겼다. 부침이 많은 서울 요지의 상권에서 얼마나 버틸까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참 다행스런 기우였다. 수불은 탄탄히 자리 잡았고, 여러 곳에 점포를 확장했다. 매일 매장을 부지런히 누비며 전통주, 와인, 맥주 등 어느 술에나 잘 어울리는 수불의 한식을 열심히 알리던 젊은 사장의 열정은 뭉근히 끓인 대추차의 향처럼 고객들의 마음에도 스며들었다. 이후 그는 더욱 다양한 매장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손님들에게 외면당한 특징 없는 식당도 그의 손길이 가면 곧잘 살아나곤 했다.

수제로 만든 술과 어울리는 달빛보쌈.
수제로 만든 술과 어울리는 달빛보쌈.
김 대표가 최근 몇 년간 정성을 들인 곳이 ‘달빛보쌈’이다. 보쌈 파는 흔한 주점이었다. 그는 거기에 달빛만의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심한복판 주점에 양조장을 지었다. 달빛보쌈에 들어서면 술 빚는 투명 공간이 보인다. 술 빚기는 만드는 이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의 기다림이 가장 중요하다. ‘품온’(발효 온도)을 높게 하면 발효 기간을 줄일 수 있지만 거칠고 좋지 못한 술밖에 얻질 못한다. 이곳은 감미료 등 첨가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달지 않고, 무겁지 않으며 탄산감 있는 그러면서 약간의 신맛이 도는 술이 목표다.

마침 방문한 날 술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늦은 밤거리 불 꺼진 매장에서 미생물들이 술을 빚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칠흑같이 깊은 바다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 같은 상상이 든다고 그는 말한다. 달빛에 가면 ‘오늘 술은 맛있네, 신맛이 덜하네’ 등 늘 본인의 술에 한마디씩 덤이 붙는다. 양조일기 블로그도 쓰는 그의 술 감상평은 아주 소상하다.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술을 맛본다는 건 수제로 만들 때만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일이다. 마치 횟집에서 양식 광어회보다 자연산 잡어회가 고수들에게 더 큰 인기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달빛보쌈에는 그날의 반찬 다섯 가지가 옹기종기 나오고 봄나물 쭈꾸미보쌈 같은 계절 메뉴가 있다. 달빛술상 메뉴는 코스 내용과 가격 모두 샐러리맨 맘에 쏙 들게 구성돼 있다. 김 대표가 생각하는 외식은 생산자, 판매자, 소비자가 모두 소외받지 않는 즐거운 문화공간이다. 요즘은 생산의 기반인 농사까지 준비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한 그의 사업은 처음엔 느린 듯하지만 대추차 마냥 주변을 그 향기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힘이 넘친다. 다음에 펼치는 그의 공간이 궁금해진다.

이윤화 음식평론가·‘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 yunaly@naver.com

○ 달빛보쌈: 서울 강남구 선릉로111길 8, 달빛보쌈정식 8800원, 달빛막걸리 9000원, 달빛술상(1인)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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