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중세시대 책은 곧 보물이었다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입력 2020-04-18 03:00수정 2020-04-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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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크리스토퍼 드 하멜 지음·이종인 옮김/728쪽·5만9800원·21세기북스
25년간 소더비서 일한 저자, 중세 채색 필사본 12권 소개
匠人의 노고 담긴 책으로 유럽 군주들 부와 재력 과시
“어떤 악마가 내 목숨과 힘을 빼앗은 뒤 물로 적신 다음 다시 물속에 집어넣는다. 새의 기쁨이 표면을 달리면서 검은 흔적과 나무의 염료를 남기며, 그 전체는 나무판자와 가죽으로 덮는다. 그러면 그것은 위대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그 자체로 거룩해진다.”

10세기 필사본 책에 나오는 수수께끼다.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책’이다.

오늘날 책은 하루의 용돈을 아껴서 장만할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이다. 하지만 인쇄술 이전의 책은 수많은 장인의 노고가 투입되는 사치품이었다. 군주들은 책 제작을 지시할 때 사치와 부의 과시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책은 황금으로 채색되고, 때로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25년간 소더비에서 필사본 경매를 담당한 저자는 유럽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매혹적인 채색 필사본 책 열두 권을 소개한다. 읽기에 앞서 수많은 화려한 도판들이 눈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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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의 손으로 제작한 필사본 책은 당대의 관습과 미의식, 경제 수준까지 반영된 보물이었다. 16세기에 만든 ‘스파뇰라 기도서’의 3, 4월 부분. 21세기북스 제공
필사본들을 ‘인터뷰하는’ 기분으로 책을 썼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들은 쉽사리 방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 절차는 섬세하고 까다롭고 정중했다. 복음서에서 기도서, 문학, 천문학, 병법서를 망라하는 각각의 책마다 남다른 주장과 사연을 굽이굽이 풀어놓는다.

이 책들은 먼저 그 ‘물성(物性)’으로 사람을 매혹한다. 기사 서두에 인용한 ‘목숨과 힘을 빼앗김’은 동물이 죽어 양피지가 되는 과정을 뜻한다. 양피지는 동물 한 마리에서 두 장만 나왔다.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가죽은 냄새도 다르다. 보관소 밖으로 나오면 이 ‘가죽 종이’들은 부풀거나 쪼그라들어 사람을 놀라게 한다. ‘새의 기쁨’은 필사 장인의 깃털 펜을 말할 터.

두 번째의 매혹은 이 책들에 실린 내용에서 온다. 천문학 책 ‘레이던 아라테아’에 실린 천문도가 816년 3월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조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가 1세기 고구려 하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버금가는 호기심을 불러온다. ‘잔 드 나바르 기도서’에 나타나는 기도의 내용들은 외로운 여군주가 치통까지 앓았음을 알려준다. 병법서 ‘비스콘티 세미데우스’에 나오는 전쟁의 그림들은 필사본 성서에 나오는 거룩한 사도들의 모습과 또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필사본 책들 각각이 겪어온 사연은 이 책이 주는 세 번째 매혹이다. ‘잔 드 나바르 기도서’는 나치 공군 책임자였던 헤르만 괴링이 약탈한 것을 프랑스군이 다시 빼앗았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를 책이 되찾기까지는 지루한 소송전이 필요했다. ‘요한계시록’의 주석서인 ‘모건 베아투스’가 19세기 유명한 사기꾼의 손에 들어갔다가 은행가 J P 모건의 소유가 되는 과정도 사뭇 흥미진진하다.

어떤 책들은 그대로 보고 베껴 쓰는 모본(母本)이 있다. 내용이 달라지거나 빠지고 새 내용이 들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책들의 ‘계보학’이 드러난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변이를 통해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과정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출연자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울려 퍼지는 카를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는 수도원에서 발견된 같은 이름의 필사본 책 속 노래들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TV에서 들리는 ‘오 포르투나’가 원래 책에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후세에 누군가가 써넣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풍성한 사연과 압도적일 만큼 아름다운 글씨, 그림으로 가득한 이 책은 2016년 출간된 이후 ‘더프 쿠퍼 논픽션상’과 여러 학술상을 수상했다.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 gustav@donga.com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크리스토퍼 드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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