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느슨한 관계’의 매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9일 16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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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모르는 사람의 집.
준비물 : 마음 속 스트레스를 꺼내 놓을 열린 마음.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5명의 직장인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집 프로젝트’의 한 장소에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이날 모두 처음 본 사이라는 것.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으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등 17개 문항으로 구성된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번아웃 증후군’으로 판정된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아야 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내 생활이 구분이 안됐다” “퇴사가 자주 마렵다” “일도 일이지만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줄을 이었다. “번아웃을 겪고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마케터, 전업 작가로 변신한 이 등 참석자의 조합은 언뜻 봐도 어색하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고, 내 아픔이나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놀랍다”며 모두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해진 세 시간을 조금 넘겨 모임은 끝났다. 작별 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눴고, 모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느슨한 관계’의 매력

‘소통 불능의 시대’ 처음 보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서로의 말에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친구, 지인, 가족과의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는 오히려 소통에서 장점이 된다.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이들이 모이며 한 번 모였다고 해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친교 활동에 대한 강제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부담감이 적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또한 독서, 공예, 서핑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목적이 분명한 모임과는 달리 모여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점이 특징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가장 활발히 참여한다. 김성용 ‘남의집 프로젝트’ 대표는 “1인가구가 늘며 현대인들에게는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부터 인생얘기까지 나누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다. 이 수요는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나중에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말할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모르는 사람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많다. 퇴사 후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 사람들은 제 새로운 도전을 걱정하거나 회의적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분들이 제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심으로 응원해 힘을 받았다”고 했다.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인기다.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취지다. 이곳에서는 주변 사람에게 터놓기 어려운 다소 오글거리는(?) 질문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등 질문에 쭈뼛거리던 참가자들도 몇 분 뒤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제게 뼈있는 조언을 하거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 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을 건넨다. 지인, 친구 수준이 해줄 수 있는 위로, 대안 제시를 넘어 전문적 해결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어렵거나, 친구들에게 꺼내놓기 힘든 고민도 비대면 방식으로 숱하게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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