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소설부터 SF까지… 장르 넘나들며 인간성과 문명 성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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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노벨상]문학상 이시구로의 삶과 작품세계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63)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아래 심연을 드러냈다”고 5일 선정 사유를 밝혔다. 영국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는 2007년 도리스 레싱 이후 10년 만이다. 일본계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에 이어 세 번째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한 이시구로는 영국 켄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하자마자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 번째 소설 ‘남아있는 나날’이 1989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 격조 있게 삶과 문명 성찰

영어로 작품을 쓰는 이시구로는 기억과 회한을 통해 인간성과 문명에 대해 깊고도 품위 있게 성찰한 작가로, 평단과 독자들의 사랑을 함께 받고 있다. 대표작인 ‘남아있는…’은 20세기 전반 영국을 배경으로 인품이 고귀한 달링턴 경을 모시는 충직한 집사 스티븐슨을 통해 충직함과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개인의 결정이 지닌 의미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앤서니 홉킨스, 에마 톰슨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1993년)로 만들었다.

유명 피아니스트를 통해 사랑, 가족, 부모, 우정의 가치를 섬세하게 조명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된 클론들의 슬픈 운명을 그린 ‘나를 보내지 마’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그린 ‘창백한…’과 인간의 헛된 욕망을 비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를 꿈꿨던 이시구로가 음악적 내공을 발휘한 ‘녹턴: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는 운명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평범한 이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노래한다. 그의 장편소설 8권은 모두 국내 출간됐다. 1995년 대영제국 훈장(OBE), 1998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았다.

○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

이시구로의 수상으로 한림원이 전통적 문학 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림원은 지난해 미국의 시인 겸 가수인 밥 딜런과 2015년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르포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왔다.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시구로는 비극적 진실을 깨닫지만 생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과 문명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치밀하고 정확한 문체로 품격 있게 성찰하는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시구로가 묵직한 주제 의식은 유지하면서도 순수 소설뿐만 아니라 복제 인간을 다룬 공상과학소설(‘나를…’), 도깨비와 기사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파묻힌 거인’) 등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의 외연을 확장하려 애쓰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민음사 대표를 지내며 이시구로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이시구로는 대중에게 익숙한 공상과학, 판타지 장르를 도입하면서도 장르 문학의 기법을 따르지 않고 고급스러운 문체로 문학적인 혁신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도 “첨단 소재를 통해 고전적 주제를 드러내는 실험을 한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건 한림원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작가답게 이시구로의 문장은 노래 가사나 시처럼 리듬감 있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어 긴 여운을 남긴다”고 말했다. 정통 문학의 품격을 지키면서도 독자적인 화법으로 새로움을 풀어낸 이시구로는 문학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문학을 담는 그릇은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노벨상#이시구로#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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