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거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브랜드의 집’

  • 동아일보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의 진화

플래그십(flagship)은 함대의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기함을 뜻하는 용어다. 유통에서 플래그십 스토어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정체성을 쏟은 일종의 체험 매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백화점 위주의 쇼핑문화에 한계를 느낀 주요 브랜드는 일찍이 플래그십 스토어에 투자해왔다.

브랜드의 스토리와 역사를 담은 제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지상 목표인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보다 특별할 수밖에 없다. 부지 선정부터 건축가, 설계, 층 구성까지 디테일 하나하나에 브랜드의 전략과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각 브랜드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집’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브랜드마다 집을 뜻하는 프랑스어 메종(maison) 혹은 영어 하우스(house)를 붙인다. 브랜드의 집, 다시 말해 브랜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점포가 들어선 지역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는 건축비만 50억∼100억 원 이상 투자한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본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느라 공사 기간도 일반 건물보다 두세 배 길어질 수 있다. 그만큼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샤넬의 한국 최초 단독 매장이 몇 년째 공사 중인 걸 보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샤넬은 2013년 청담동 명품거리에 부지를 매입했지만(700억 원 상당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에도 공사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명품거리의 부상


갤러리아 명품관에서 청담사거리까지의 약 800m를 가리켜 청담동 명품거리라 한다. 갤러리아 명품관이 등장한 것은 1990년. 당시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색다른 무리, ‘오렌지족’이 압구정동에 등장하면서 한화그룹은 이곳에 수입 브랜드를 모은 백화점을 만들기로 하고, 명품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명품이란 단어가 고급 패션 브랜드를 통칭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1990년대 말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이른바 3대 명품이 이 백화점에 모두 들어가면서 서울 압구정동 일대는 명실상부한 명품의 집산지로 불렸다.

한국의 명품 소비층이 늘면서 브랜드들은 백화점 밖으로 눈을 돌렸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커졌다. 선진 유통에 밝은 이명희 신세계 명예회장이 청담동 일대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후반 즈음이다. 최초의 청담동 명품거리의 명품 브랜드 점포는 1997년 문을 연 프라다로 알려져 있다. 2000년 루이뷔통이 이 거리에 존재감을 드러낸 뒤 청담동은 본격적인 ‘명품 시대’를 열었다.

2010년 이후 서울이 아시아 패션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는 또 한 번 진화를 거쳤다. 2015년 버버리와 디올, 2016년 MCM, 겐조, 미우미우가 문을 열었다. 까르띠에와 오메가도 새 단장했다. 내년에는 샤넬의 국내 최초 플래그십 스토어가 개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부동산 컨설팅 업체인 쿠시먼드웨이크필드 코리아 김성순 전무는 “아직 한국에 단독 매장이 없는 브랜드들이 꾸준히 청담동 명품거리를 두드린다. 본사에서도 선호하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우아한 건축물의 각축전

크리스챤 디올의 ‘하우스 오브 디올’. 포토그래퍼 신경섭
크리스챤 디올의 ‘하우스 오브 디올’. 포토그래퍼 신경섭
청담동 명품거리에서 도산대로까지 걷다 보면 2015년 6월 개장한 크리스챤 디올의 ‘하우스 오브 디올’을 볼 수 있다. 볼륨감 넘치게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 같은 건물이다. 설계와 시공에만 4년이 걸렸다. 독특한 이 건물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건축가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가 설계했다. 인테리어는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가 피터 마리노가 디자인했다.

포르장파르가 설계한 뉴욕의 LVMH 타워는 지역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정의한 건물로 꼽힌다. 서울의 하우스 오브 디올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의 볼륨감은 파리 몽테뉴가 30번지 디올 오트 쿠튀 아틀리에에서 만든 캔버스 천의 소재, 실루엣,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까르띠에의 ‘까르띠에 메종 청담’. 까르띠에 제공
까르띠에의 ‘까르띠에 메종 청담’. 까르띠에 제공
2008년 아시아 최초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였던 까르띠에는 지난해 6월 이전해 새로운 ‘까르띠에 메종 청담’을 열었다. 이 우아한 새 건물은 프랑스의 대저택 건축 양식을 뜻하는 ‘호텔 파르티퀼리에(hotel particulier)’의 형식을 따라 꾸며졌다. 파리 뤼드라페에 있는 까르띠에 맨션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을 녹아들어간 건축물이다.

시릴 비녜옹 까르띠에 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CEO)는 개장 당시 “우리는 메종(플래그십 스토어)과 맨션(파리, 런던, 뉴욕 세 곳의 역사적인 매장) 등 큰 규모의 단독 부티크가 까르띠에의 정신과 해당 국가의 개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장려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까르띠에 메종 청담은 실내 장식과 건축적 면모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외관의 직선무늬는 한옥의 문살에서 영감을 받았고, 1층 입구에는 기와지붕을 떠올리게 하는 디딤돌이 있다.
영국 패션하우스 버버리의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외관의 버버리 체크문양 파사드가 눈에 띈다. 버버리코리아 제공
영국 패션하우스 버버리의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외관의 버버리 체크문양 파사드가 눈에 띈다. 버버리코리아 제공

2015년 10월 첫선을 보인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은 그리스토퍼 베일리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CCO)의 감독하에 디자인된 11층 건물이다. 어둠이 몰리면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외관의 버버리 체크 문양 파사드가 빛이 난다.

버버리의 DK88백 컬렉션이 전시된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버버리 코리아 제공
버버리의 DK88백 컬렉션이 전시된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버버리 코리아 제공
유럽 명품 브랜드의 행보는 명품을 지향하는 한국 브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 화장품의 ‘전설’이 된 아모레퍼시시픽 ‘설화수’는 지난해 도산공원 앞 에르메스 건너편에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아시아의 지혜와 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세계적인 중국계 디자이너 듀오 네리 앤 후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건축가는 등불이 어둠을 밝혀 길을 안내하듯 아시아의 미(美)에 대한 지혜가 아름다움을 비친다는 의미를 담아 디자인했다.

특별한 서비스, 문화를 느끼다

오메가의 ‘오메가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오메가 코리아 제공
오메가의 ‘오메가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오메가 코리아 제공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백화점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특별한 서비스와 문화의 향연이 이어진다. 2008년 첫선을 보인 뒤 지난해 대대적으로 리뉴얼해 재탄생한 오메가의 플래그십 스토어 1층과 2층에서는 남녀 시계는 물론, 파인 주얼리 및 가죽 제품의 전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다. 3층과 4층은 브랜드의 역사와 유산을 느낄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구성된다. 워치메이커가 상주하고 있어 간단한 수리도 간편하게 받을 수 있다.

까르띠에 메종 청담의 1층 가든. 까르띠에 제공
까르띠에 메종 청담의 1층 가든. 까르띠에 제공
까르띠에는 고객들이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한다. 아름다운 프랑스 주얼리를 둘러보고 한국의 전통 차와 다과를 맛볼 수 있다. 올여름에는 팥양갱, 잣누룽지, 영귤청차, 죽순껍질차가 제공된다.

특별한 카페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하우스 오브 디올의 루프톱에는 달콤한 마카롱으로 유명한 파티시에 피에르 에르메의 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조용한 서울의 트렌디한 거리에서 즐기는 마카롱, 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일품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김윤하 작가의 ‘그 우발에 대한, 방치하고 싶은 그 불편에 대한, 그럼에도 의도할 수 없는 그 오염된 수단에 대한, 그 전생을 수행하려고 증식하다가, 경계를 발견하고는’이라는 긴 이름의 작품. 사진 남기용ⓒ에르메스 재단 제공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전시된 김윤하 작가의 ‘그 우발에 대한, 방치하고 싶은 그 불편에 대한, 그럼에도 의도할 수 없는 그 오염된 수단에 대한, 그 전생을 수행하려고 증식하다가, 경계를 발견하고는’이라는 긴 이름의 작품. 사진 남기용ⓒ에르메스 재단 제공
에르메스 지하 1층의 전시 공간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컨템포러리 작가들의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2006년 11월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작가 다니엘 뷰렌 전시로 문을 열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지난달부터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의 재개관을 맞이해 전시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를 선보이고 있다. 전시 제목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이라고 전해지는 인용구이다. 20, 30대 젊은 작가들이 마치 ‘친구’를 부르듯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작가들의 현재, 미래를 구상하는 전시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플래그십 스토어#에르메스#버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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