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밑줄긋기

  • 동아일보

책을 읽으며 이따금 연필로 밑줄을 긋고 이런저런 메모를 더한다. 물론 당연히 혼자 보는 책에만.

그런데 몇 차례 거듭 읽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펴들 때, 이렇게 밑줄 긋고 메모하는 게 말짱 헛짓 아닐까 싶을 때가 적잖다.

그때 느껴지는 건 허무함이 아닌 부끄러움이다. 공감 깊다 여겨 밑줄 그은 책 속 문장들만 잊지 않도록 거듭 새기며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적어도 열 배쯤은 나은 사람, 적어도 백 배쯤은 후회가 적은 사람이었을 거다.

어찌 보면 하루처럼 어찌 보면 한 해처럼 4월이 후려치듯 지나갔다. 쉬는 날 새벽에 차를 몰고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덮개 돌판 위 먼지를 쓸고 한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향이 자꾸 꺼졌다.

나는 언제나 “수없이 들은 말을 반복한다”고 아버지께 불평했다. 답 없는 세상에서 그 말씀만 따르고 살았어도 조금은 지금보다 사람다운 사람이지 않았을까, 뒤늦게 생각한다.

지저분한 기름때처럼 굳어 있던 집 안 책장을 조금씩 허물며 정리하다가 여러 번 손을 멈췄다. 어수룩한 내 의지와 계획대로 채워온 부분이 삶에서 어느 정도나 될까. 우연히 훑다 펴든 페이지에서 퍽 하고 뒤통수 때리는 문장이 드문드문 나왔다.

ⓒ오연경
다시 밑줄을 긋는다. 금세 또 잊어버릴 거다. 이미 읽은 문장을 거듭 잊었음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기 위해,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

뒤늦게 깨달아 소용없음이 틀림없는 사고(思考) 묶음의 효용은 뭘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부인하기 어려운 명제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래도 나보다 반 발짝만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 보라”는, 어제 죽은 내가 오늘의 나에게 남긴 유언. 그 언저리일 듯.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책#밑줄#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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