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함인희]‘끝물’ 앞 단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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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도, 새콤달콤 과일도, 끝물엔 매력 잃지만
성장과정에서 정성 다해 관리하면 마지막 모습도 깨끗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아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올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다. 불볕더위를 넘어 가마솥더위란 표현이 과장은커녕 뼛속까지 실감 날 만큼. 이러다 한반도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면서 야자수가 가로수로 등장하고, 사과 배 곶감 대신 구아버 두리안 망고스틴을 조상님 제사상에 올릴 날이 머지않았다는 농담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1994년 이후 20여 년 만의 기록적 폭염 때문인가, 우리 집 블루베리 밭에선 조생 중생 만생종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동시에 익어가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예년보다 보름이나 일찍 시작된 수확은 ‘끝물’ 또한 보름 이상을 앞당겨, 뒤늦게 생(生)블루베리를 찾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한데 열매가 끝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자니 불현듯 우리네 인생과 많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수확기엔 탐스럽고 탱탱하던 열매가 끝물로 갈수록 크기가 점점 작아지면서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부끄러운 상태가 된다. 매력적으로 빛나던 때깔은 희미해지거나 초라하게 바랜 빛이 되어 가고, 혀끝을 생생하게 자극하던 새콤달콤한 맛은 싱겁거나 무미(無味)한 상태로 변하고 만다. 싱싱했던 식감 또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물컹거리거나 탄력을 잃고 만다. 예전 어르신들께서 “이젠 끝물이네”라며 혀를 끌끌 차시던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특히 올여름 같은 불볕더위에선 열매들도 화상(火傷)을 입어, 채 크지도 못한 채 빨갛게 타버리고 말아 끝물의 처연함을 더해 가기도 했다.

떨어지는 꽃잎보다는 흐드러지게 핀 절정기의 꽃이 예쁘고, 끝물에 맺히는 초라한 과실보다는 한창 수확기의 잘생긴 열매가 탐스럽고,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보다는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의 모습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누군들 부인할 수 있으랴만, 꽃이든 과일이든 사람이든 생물에겐 필히 끝이 있게 마련이요, 끝을 향해 가는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연의 섭리 앞에선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더욱 생물의 끝물 속엔 꽃피고 잎 나고 열매 맺기까지 지나온 과정이 오롯이 녹아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알맞은 때에 가지치기를 제대로 해주고, 지나치게 꽃눈이 많이 맺혔을 때엔 적당히 훑어주고, 열매 속에 벌레가 자리 잡기 전에 적절한 관리를 해주면, 끝물 또한 상대적으로 보다 깨끗하게 정돈되게 마련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은 물론일 듯하다. 젊은 시절 방만했던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하고, 욕심과 거품을 거두어내고 진정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에 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다양한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꾸준히 단련한다면, 생애 주기의 마지막을 지나가는 모습 속에 성숙하면서도 정돈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과 같은 남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평범한 우리로선 스러져 가는 낙화(落花)나 열매의 끝물을 보며 전성기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아쉬워하고 현재의 초라한 모습에 서글픔을 느끼곤 하지만, 낙화인들 꽃이 아닐 리 없고 오히려 마지막 가는 길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음을 놓치지 않는 시인의 혜안이 너나없이 절실히 필요하리라.

며칠 후 말복을 지나노라면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가을에 자리를 내줄 것이고, 가을도 곧 다가올 겨울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한창 때 젊음이 영원할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열매를 맺고야 마는 끝물 앞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읽어낼 수 있길 소망해 본다. 더불어 젊음의 활력과 에너지를 기준 삼아 생애 주기의 마지막 단계를 폄훼하거나 평가절하하기보다는, 겉모습은 초라할지언정 그 속엔 희생과 헌신의 발자취가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길 갈망해 본다. ‘끝물’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걸 보니 역시 나이 들어감은 못 속이는가 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여름#끝물#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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