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여신 강림!… 라지 로마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9일 11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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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⑨


서울 청담동의 명품 샵 M부티크의 O대표는 이탈리아에 출장 오면 주로 밀라노, 피렌체에 머문다. 거기에 럭셔리 브랜드의 본사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수도 로마에는 가끔 온다.
2016년 5월 로마를 찾은 것은 로마 시장 선거운동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여성 후보 비르지니아 라지(Virginia Raggi)가 돌풍을 일으킨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녀의 유세 장면이 보고 싶었다. 1978년생이라니 O대표와 엇비슷한 나이다.

인연이란 묘한 법이다. O대표는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책을 저자에게서 직접 선물로 받고 탐독한 바 있다. 그러다 2009년 2월 문화방송(MBC)의 시사프로그램 ‘W’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기에 그 책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살필까 하고 호기심으로 시청했다.

그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베페 그릴로(Beppe Grillo)라는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1987년 TV 정치풍자 쇼 ‘판타스티코’에서 사회당 총리 크락시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TV 출연을 금지 당했다. 그후 그는 전국을 돌면서 길거리 공연에서 풍자 토크쇼를 벌여 주목을 끌었다. 이탈리아의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국민은 그릴로의 독설에 열광했다. 관객이 점점 늘어나 으레 수만 명이 운집했다.
1993년 TV에 다시 출연할 기회를 얻었지만 시청률이 너무 높아 ‘잘리는’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됐다. 16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시청하면서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정권에 의해 방송 출연이 금지된 것이다. 이후 그는 방송 복귀를 스스로 거부했다.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풀풀 풍기는 정치판을 비판하는 그릴로의 풍자(satire)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그럴수록 정부의 검열과 탄압의 강도가 높아져 갔다. 하지만 그 어떤 채찍도 그의 풍자와 시민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공연과 강연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매년 100회 이상 열린다.
“정부와 언론은 믿지 못해도 그릴로의 말은 믿는다!”
국민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고 갈채를 보냈다.

베페 그릴로는 블로그에서 ‘깨끗한 국회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다. 마침내 2007년 9월 7일, 이탈리아 전국에서 시민 200만 명이 운집한 ‘V-DAY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이탈리아 어로 Vaffa-Day(빌어먹을 날)라는 뜻인 V-Day는 이후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탈리아의 기념일이 되었다. 이는 2011년 뉴욕 월가를 중심으로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점령하라(Occupy)’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재력가이자 권력자인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그릴로의 신랄한 ‘풍자 폭탄’을 맞고 묵사발이 됐다. 그릴로는 토크쇼뿐 아니라 SNS를 통해서도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정당은 죽었다!”
그릴로는 그렇게 외치며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시민 참여를 촉구했다. 호응을 얻자 그는 직접 민주주의 ‘5성(星) 운동’을 펼쳐갔다. 국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2009년 ‘5성 운동당’을 결성하는 데 이른다.

5성 운동당은 2012년 기초지방선거에서 4명의 당선자를 냈고 2013년 총선에서는 하원에서 25.5%, 상원에서 23.8%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이탈리아 제3당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 그릴로가 내세운 공약은 파격적이었다. 전 국민 인터넷 사용 무료화, 모든 초등학생에게 태블릿 PC 제공, 주 20시간 근로실행 등이었다. 이 공약 때문에 ‘허풍쟁이’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2009년 그가 주창한 5성 운동은 ①물(acqua) ②환경(ambiente) ③ 교통(trasporti) ④발전(sviluppo) ⑤에너지(energia) 등이다.

‘가방끈’이 짧은 O대표는 ‘독학의 으뜸 비결은 독서’라는 소신을 갖고 자투리 시간엔 으레 서점에 들른다. 읽을 만한 책은 손으로 들추어 보며 골라야 직성이 풀린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베페 그릴로가 쓴 <진실을 말하는 광대>를 발견했다. 얼른 사들고 나와서 인근 카페에 앉아 단숨에 읽었다. 한국어 번역도 매끄러웠다. 저자는 타락한 언론을 대신해 부패한 권력, 이 권력과 결탁한 기득권층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릴로는 “좌파든 우파든 정치인들은 모두 똑같은 놈들”이라고 날을 세우고 당리당략에만 코를 박은 정당 정치의 현실을 질타했다. 썩은 정권과 짬짜미한 대기업, 부초(浮草)처럼 떠다니는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백수, 방치된 청소년, 방황하는 불법 이민자, 심각한 환경오염 등 여러 이슈에 대해 거침없는 ‘하이 킥’을 날리는 내용이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미래를 함께 만들자고 호소했다. O대표는 책을 독파하고 눈을 감았다.
분노했다! 공감했다! 통쾌했다!

이 책의 ‘밀라노의 기적’이란 글에 인용된 노벨문학상 수상자 다리오 포(Dario Fo)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돋보였다.
“권력은 웃음을 견디지 못한다. 웃음은 사람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렇다! 웃음은 펜보다 강하고 권력보다도 힘차다!

O대표는 다리오 포에 대해서도 조사해 봤다. 그도 1959년 ‘다리오 포-프랑카 라메’라는 극단을 만들어 국영 TV에서 정치풍자극을 공연하다 권력자의 눈총을 받아 중도하차했다. 약자를 대변하고 강자를 비판하는 등 현실 참여성과 문학성 높은 작품을 쓴 공적으로 199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O대표는 그릴로의 존재를 한동안 잊었다가 2014년 6월 28일 경주박물관에서 어느 특강을 듣고 다시 떠올리게 됐다. 강연 제목이 ‘세종 르네상스와 서구 르네상스’여서 ‘르네상스’라는 말이 붙었기에 일단 강연장에 들어섰다.
강사인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연단에 서자 O대표는 어리둥절했다. 둥그스름한 곱슬머리에 턱수염! 그릴로와 외모가 흡사했다. 싱크로 율이 70%쯤 될까? 서양인과 동양인이 닮기가 쉽지 않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연기자 김진태 님이 붕어빵처럼 닮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교수의 얼굴을 살피는 데 신경을 쓰느라 강연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잡념은 꼬리를 물어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에 족쇄를 찼던 코미디언 이주일 님, 연기자 박용식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님은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며 ‘오리 궁둥이 걸음’으로 전 국민을 울리고 웃긴 예인(藝人)이었다. 그의 본명은 정주일. 그는 1992년 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막장 코미디’가 벌어지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정주일 의원은 아마추어 코미디언에 불과했다. 그가 국회의사당을 떠나면서 한 말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나옵니다.”

박홍규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O대표는 상경하자마자 강남 교보문고를 찾아 박 교수의 저서들을 살폈다. 법학자인데도 마키아벨리, 고흐, 카프카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에 대해 책을 내놓았다. 그의 열정적인 저술 활동에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5권을 사들고 서둘러 귀가해 밤늦게까지 찬찬히 읽었다. 그 가운데 <마키아벨리, 시민정치의 오래된 미래>에서 피렌체에 관한 아름다운 묘사를 발견하고는 피렌체를 20여 차례나 방문하고도 그런 점을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무감각을 자탄했다. 박 교수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환경주의자라는 점도 그릴로와 비슷했다.

2016년 4월 한국에서 국회의원 선거판 열기가 달아오르자 O대표는 새삼 이탈리아의 ‘정치풍자의 달인’이 떠올랐다. 그 무렵 국내 신문에 보도된 로마 시장 선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릴로가 주도하는 5성 운동당의 젊은 여성 후보 비르지니아 라지가 당선유력자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O대표는 밀라노 출장 업무를 마치고 로마에 들러 라지의 유세 현장을 보기로 작정했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 광장. 5성 운동당의 유세가 열리는 곳에 O대표는 500cc짜리 시원한 탄산수 산펠레그리노 1병을 배낭에 넣고 찾아갔다. 수많은 젊은이가 ‘썩은 정치꾼 몰아내자!’ ‘우리의 희망, 다섯 개 별!’ 등의 글을 쓴 피켓을 들고 환호했다.
먼발치의 연단에 선 그릴로의 모습이 보였다. 마이크가 웅웅거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앞자리에 선 청중이 폭소를 터뜨리는 것으로 보아 기존 정치인, 재벌, 언론에 ‘쓴 소리’를 터뜨리는 모양이었다. 그릴로가 뭘 질문하자 청중은 큰 소리로 호응했다.
“시(Sì!, 옳소!)”

이윽고 라지 후보가 단상에 올라왔다. 무늬 없는 흰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멀리서 봐도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라지 후보의 몸에서 자력(磁力)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O대표는 그 힘에 끌리다시피 하며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드디어 라지 후보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새 빗자루로 청소합시다!”
라지 후보가 이렇게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청중 쪽을 바라볼 때 O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시(Sì)!”
O대표는 이같이 화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라지 후보도 뭇 서양인 사이에 낀 동양인 여성 O대표에게 손을 흔들며 살포시 웃었다.
“디바(Diva, 여신)!”
O대표는 몸이 감전된 듯 부르르 떨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디바!”
O대표 주위의 몇몇 청년도 따라서 이렇게 연호(連呼)했다. O대표는 목청이 터져라 ‘디바!’를 반복했다. 따가운 봄볕 탓인지, 무리한 여행 때문인지, 고함을 질러서인지 O대표는 눈앞이 까무룩 어질어질해졌다.

“정신이 좀 드세요?”
O대표가 눈을 뜨니 눈앞에 그릴로가 어른거렸다.
“시뇨르(Signor, 미스터) 그릴로?”
O대표는 그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아뇨. 저는 그릴로가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릴로를 닮은 웬 청년이었다. 더벅머리에 서양인치고는 얼굴이 둥글넓적했다.
“시뇨르 그릴로와 비슷하게 생겼군요.”
“그렇잖아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답니다. 겉모습만 그렇지 그분의 천재적인 유머감각과 활화산 같은 용기를 저는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허접 짝퉁일 뿐이죠.”
“자기 비하하지 마세요. 뼛속도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시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뮤즈(Muse)같이 말씀하시네요.”

O대표는 자신의 팔목에 링거가 꽂혀 있음을 알았다.
“제가 의식을 잃었군요. 낯선 이방인을 병원에 데려오시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청년의 성함은?”
“무기고(Mughigo)입니다.”
“무기고? 아르마멘따리오(armamentàrio)? 호호호!”
“한국인이세요?”
“그래요. 무기를 쌓아놓은 ‘무기고’가 이름이라니 전투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네요.”
“제 이름이 한국말로 그런 뜻이라는 사실은 제 여자 친구에게 들었답니다.”
“여자 친구분이 한국어를 잘 아시나요?”
“제 여친 소피아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데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인터뷰하겠다고 벼르며 한국말을 익혔답니다.”
“야심이 대단한 여성이군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한국말을 조금 배웠답니다.”

기자 및 시인 지망생인 무기고는 5성 운동당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나왔다고 한다. 유세장에 갈 때마다 그릴로와 흡사하다는 이유로 기념 촬영을 당한단다.
“친구 몇 분과 나오셨나요? 제가 근사한 곳에서 친구분들 모두 초청해 저녁 식사를 모시고 싶네요.”
“오늘 밤 열차로 나폴리에 가야 해요. 역 부근에서 가볍게 요기하면 됩니다. 열차를 타기 전저희가 음악 살롱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기 함께 가시지요.”
“음악 살롱?”
“친구 가운데 테너 성악가가 있답니다. 그 친구의 할아버지가 세운 살롱인데 루치아노 파바로티 선생이 열차 여행을 하려고 테르미니 역에 올 때면 그곳에서 기다리면서 노래 연습도 하는 곳이지요.”

O대표는 무기고를 따라 대로변 뒤편에 있는 작은 길로 접어들어 아담한 건물의 살롱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엔 낡은 건물이었으나 실내에 들어가니 화려한 카펫, 휘황한 샹들리에, 큼직한 그랜드 피아노가 돋보였다.
“아까 ‘디바!’를 선창한 분입니다.”
무기고가 O대표를 소개하자 청춘 남녀 10여 명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디바 구호 덕분에 오늘 유세장 분위기가 더욱 활기찼습니다!”
무기고의 친구인 성악가가 O대표에게 목례를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시뇨르 그릴로를 존경하기에 머나먼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분과 라지 후보를 육안으로 봤으니 오늘은 제 인생에서 더없이 소중한 날입니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에 있는 소도시 소렌토가 고향이라는 성악가는 O대표를 환영하는 의미로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불렀다.

비데오 마레 꽌떼 벨로
스삐라 딴뚜 센띠멘또
꼬메 뚜아끼 띠에니아 멘떼
까쉐 따뚜 파이에 수나…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구나…)

O대표는 소렌토, 나폴리의 토속 방언이 그득한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무기고가 한국어로 떠듬거리며 말을 했다.
“지는(저는)예 나폴리 사투리가 심하거덩예. 한국에서도 남쪽 갱상도 사투리가 포준(표준)말하고 억수로(상당히) 다르다카데예.”
“아이고! 그 원단 경상도 사투리는 어디에서 배우셨어요?”
“우리 애인이 일하는 한국식당에 가모(가면) 갱상도 손님들이 마이(많이) 옵니더. 그분들한테 한 마디 두 마디 배웠십니더.”
“호호호! 무기고님! 한국에 와서 그 사투리만 써도 개그맨으로 큰 인기를 얻겠네요.”
“농담 아이지예(아니죠)?”
“진담입니더예! 호호호!”
“진짜로 한국에 갈낍니더예! 하하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무기고는 O대표를 무대 위로 데려갔다. 작은 이벤트를 해보이겠단다. 얼떨결에 무대로 올라간 그녀는 무기고가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젊은이들이 O대표를 둘러싸고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몸에 하얀 망토를 걸쳤다.
“눈을 뜨고 이걸 잡으세요.”
O대표는 무기고가 건네는 막대기 모양의 홀(笏)을 쥐고 일어났다. 조명이 무대 위로 비치면서 왕관과 홀에서 번쩍 빛이 났다.

“디바가 강림하셨도다!”
성악가의 선창이 나오자 이어 다른 청년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디바!”
“디바!”

O대표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무대 위를 거닐었다.
무기고가 성악가 친구에게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를 부를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소프라노가 불러야지. 여기 우리 일행 가운데 이 노래 부를 사람이 없으니 CD로 듣자.”
무기고가 O대표에게 누가 부른 노래를 들을지 물었다.
“마리아 칼라스 노래가 압권이지요. 하지만 오늘은 아이다 가리풀리나 노래를 들어보렵니다.”

O대표는 2014년 6월 9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평화음악회’에서 신예 소프라노 가리풀리나의 노래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 러시아의 타타르 자치공화국 출신인 그녀는 그날 ‘그리운 금강산’과 ‘밀양 아리랑’을 한국어로 완전히 외워 악보를 보지 않고 불렀다. 특히 한복을 입고 ‘밀양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에서 그녀의 먼 조상이었을 타타르(달단)족 장군이 상상 속에 떠올랐다. 달단족과 한민족이 한 핏줄이라는 학설이 있지 않으냐.

가리풀리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O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위로 쳐들고 춤을 추었다.

카스타 디바 체 인아르겐티
케스테 사크레 안티체 피안테
(정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이 신성하고 오래 된 나무들을)


*추신

O대표는 한국에 돌아온 뒤 로마 시장 선거에서 라지 후보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6년 2월 후보로 나설 때만 해도 무명이던 그녀는 4개월의 짧은 선거 운동 기간에 전국적 ‘신데렐라’로 부상한 것이다. 2700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수장에 오른 것이다.

여성 변호사인 라지 후보는 6월 19일 치러진 지방선거 결선투표에서 67.2%의 득표율로, 집권당의 로베르토 자게티 후보를 2배 이상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며 당선됐다. 2013년 지방선거에서 시의원이 된 라지는 맑은 물 공급, 교육환경 개선, 부패 척결, 공공교통 개선, 2024년 올림픽 유치 반대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북부 공업도시 토리노에서도 5성 운동당의 31세 여성 키아라 아펜디노 후보가 54.6%의 지지를 얻어 시장에 당선됐다. 로마와 토리노에서 신생 정당의 여성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약진한 5성 운동당은 2018년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전국 정당으로 변신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여행#라지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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