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병영일지 ‘군영등록’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5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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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 안쪽 빈 땅을 집 없는 병사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1679년 6월 23일 즉위 5년을 맞은 숙종이 내린 전교다. 직업군인인 훈련도감 병사들 중에는 지방 출신이 적지 않아 식구와 함께 남의 집 행랑채 등을 빌려 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폐쇄됐던 남소문(서울 중구 국립극장 인근)이 개방되자 남소문 안 쪽의 너른 빈 땅을 일부 양반들이 차지하려고 했다. 이에 병조판서 정유악이 집 없는 군인들에게 이 땅을 주자는 의견을 내자 숙종이 따랐던 것. 현대의 ‘군인 아파트’와 같은 주거복지 정책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기록은 훈련도감의 업무일지인 훈국등록(訓局謄錄)에 나온다. ‘기록의 나라’ 조선은 병영 일지도 꼼꼼하게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훈국등록을 비롯해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등의 업무일지인 군영등록(軍營謄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최근 밝혔다. 이배용 한중연 원장은 “지난해 국내 후보 선정 심사에서 아쉽게 탈락했지만 이만한 분량의 원본 병영일지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밝혔다.

군영등록은 1593~1882년 290년간 군영의 일일 업무를 기록한 것으로 한중연과 서울대 규장각이 모두 689책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의 주요 장수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 다른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반 병사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는 군영등록 뿐이다.

조선의 군인들은 생계를 어떻게 유지했을까? 훈련도감 군인의 경우 조정에서 매달 쌀 9말과 1년에 두 번 군복을 지을 목면(木綿)을 지급받았지만 생계를 잇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종 말 숙종 초 대기근이 들자 그마저 쌀 1말이 삭감되기도 했다. 군인들은 생계를 위해 다양한 물건을 파는 난전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전매권을 가진 시전 상인과 다툼이 잦았다. 이에 숙종은 군인에게 다른 물건은 판매를 금하되 주요 판매 품목이었던 전립(氈笠·무관의 모자)과 망건은 팔 수 있도록 했다. 이 기록 역시 훈국등록에 나온다.

이밖에 표류해 조선에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와 하멜의 훈련도감 근무 기록, 노비 출신으로 훈련도감 무관이 돼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위했던 안사민이 원래 주인의 소유권 주장 때문에 다시 노비로 전락할 뻔한 사연 등이 흥미롭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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