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기자의 談담]“10년 된, 내 딸 같은 도서관… 이제 진아를 놓아줄 수 있겠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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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기증 이상철씨의 父情

11일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독립문공원길에 있는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1층에서 이 도서관의 건립 기증자인 이상철 현진어패럴 대표가 웃고 있다. 이 대표 뒤로 보이는 사진 속 여학생은 이 대표의 둘째 딸 이진아 씨로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1일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독립문공원길에 있는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1층에서 이 도서관의 건립 기증자인 이상철 현진어패럴 대표가 웃고 있다. 이 대표 뒤로 보이는 사진 속 여학생은 이 대표의 둘째 딸 이진아 씨로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이진아기념도서관.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 안에 있는 구립도서관이다. 나무의 질감을 담은 건물, 인왕산이 펼쳐지는 큰 창문. 마당에서 어르신들은 체조를 하고, 아이들은 뛰논다. 국내 공공건물 중 평범한 인물의 이름을 붙인 사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진아기념도서관이라고 하면 “이진아가 우리나라 독립투사인가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이진아 씨는 12년 전 미국 어학연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당시 23세의 대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숨진 딸을 기리기 위해 2005년 50억 원을 도서관 건립비로 기증하면서 딱 한 가지를 요청했다. “도서관에 진아 이름을 붙여주세요.” 그 도서관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구립도서관인데도 한 달에 5만 명 이상이 이용한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국내 공공도서관의 모범이 됐다.

큰돈을 쾌척하고도 그동안 인터뷰를 고사했던 진아 씨의 아버지를 11일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만났다. 국내 중소 의류수출업체인 현진어패럴의 이상철 대표(68)다. 도서관을 지었던 한형우 호서대 건축학과 교수, 개관 때부터 일해 온 이정수 도서관장도 함께했다. 》
11일 이진아기념도서관 앞에서 이 도서관의 이정수 관장, 기증자 이상철 씨, 건축가 한형우 호서대 건축학과 교수(왼쪽부터)가 도서관의 10년간 추억을 나누며 웃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1일 이진아기념도서관 앞에서 이 도서관의 이정수 관장, 기증자 이상철 씨, 건축가 한형우 호서대 건축학과 교수(왼쪽부터)가 도서관의 10년간 추억을 나누며 웃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딸 이름 석자 남겨주고 싶었다

―도서관이 참 예쁩니다.

“저는 기증만 했을 뿐인걸요. 한 교수가 제 마음을 건물에 잘 담아줬어요. 이 관장도 10년 동안 반듯하게 운영해줬고요.”

―딸의 사고가 도서관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유, 참.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아무 일도 안 됩디다. 한참 동안 술만 마셨어요. 그러다 뭘 좀 해야겠다, 딸 이름 석 자를 남겨주고 싶다 생각하니, 요 녀석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고교 후배인 정두언 당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찾아가 도서관 건립 기증 의사를 밝혔어요. 여러 구청이 관심을 보입디다. 가장 적극적이던 서대문구청 직원과 맨 먼저 와봤는데, 독립공원 자락에 있어 더이상 좋은 자리가 없는 거예요. 며칠 후 바로 기부 협약식을 맺고 1년 반의 공사를 거쳐 진아 생일에 맞춰 개관(2005년 9월 15일)했습니다.”

―도서관엔 자주 들릅니까.

“1년에 서너 차례 옵니다. 전문가들이 워낙 잘 운영해주니까요.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들에게 ‘아이들 예쁩니다. 제가 진아 아빠예요’라고 하면 다들 반가워하면서 ‘이렇게 좋은 도서관 지어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진아가 하늘나라에서 ‘아빠, 고마워요.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어렵더라도 내 사업을 하자며 1970년대 인천 부평에서 봉제공장을 시작했다. 당시 할 수 있는 사업이 우리나라 수출업종인 봉제였다고 한다. 1987년엔 ‘현진어패럴’을 세웠다. 두 딸인 현아, 진아 이름의 앞 글자를 땄다. 어질 현(賢), 보배 진(珍).

○ 아이와 함께 못했던 시간 후회

―딸들의 이름을 사업체에 붙였으니, ‘딸 바보’이셨나 봅니다.


“애들을 예뻐했죠. 그런데 우리 시절엔 시간 안 따지고 일을 많이 했어요. 평일엔 술 마시고, 휴일엔 자고. 애들 데리고 놀러 가본 적이 없어요. 진아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시간을 같이 많이 못한 것, 대화를 많이 못한 것.”

도서관 1층에는 10년 전 진아 씨의 사진 동판이 크게 벽면을 채우고 있다. ‘1980년 9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나다. 2003년 6월 2일 미국에서 영원한 나라로 가다. 2005년 9월 15일 책 좋아했던 딸을 그리며 아빠 엄마 언니가 건립 기증하다.’

거액을 기증했으니 가족의 이름도 새길 법한데, 그저 ‘아빠 엄마 언니’다. 진아 씨 사진은 불의의 사고 석 달 전에 뉴욕 출장길의 아버지와 찍었던 사진이다. 평생 바쁘게 일하느라 변변한 부녀(父女) 사진이 없었는데, 마침 미국 어학연수 중 아버지를 만나 2박 3일간 함께 지냈던 것이다. 딸의 유품인 카메라에서 이 사진이 나오자 아버지는 자신의 얼굴은 빼고 딸 사진만 도서관에 걸게 했다. ‘이진아기념도서관’ 중 서체가 특별히 예쁜 ‘이진아’는 진아 씨가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발췌한 글씨다.

○ 기증…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기증한 50억 원은 큰돈인데요.

“제가 6남매 중 둘째인데, 중학교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셔서 어머니도 고생만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삯바느질 수출공장을 꿋꿋하게 버티면서 했더니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큰돈을 벌었습니다. 50억 원은 예나 지금이나 큰돈이죠. 그런데 진아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하니 아까운 게 하나도 없습디다.”

‘삯바느질 공장’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는 성공한 사업가다. 1987년 회사 설립 첫해 수출실적이 30만 달러였던 현진어패럴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94년 제31회 무역의 날에 ‘1000만 불 수출의 탑’을, 다시 7년 후인 2001년엔 ‘1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사업은 잘되십니까.


“예전엔 중남미, 사이판 등에서 옷을 만들어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했는데, 최근엔 베트남 호찌민 외곽에만 공장(직원 5000명)을 두고 있습니다. 매출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요. 베트남도 이제 한계에 왔어요. 임금은 계속 오르는데 국제경기가 안 좋으니까 바이어한테 받는 돈은 딱 묶여 있거든요. 진작 출구전략을 짰어야 하는데…. 만만찮은 상황이 됐어요.”

―도서관 기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사업은 좋을 때, 나쁠 때 부침이 있잖아요. 제가 좀 힘들어하면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야, 너 그때 그 돈(도서관 건립 기증비) 있었으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이 도서관 지은 일인걸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때 더 크게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기증 당시 사모님은 뭐라고 했나요.

“‘당신 돈 있수? 하고 싶은 대로 해요’라던데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의 신앙이 두터워요. 나는 진아를 보내고 한참 망가져 있는데, 아내는 저 사람이 엄마 맞나 싶을 정도로 의연합디다. 그래서 저도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진아 앞으로 들어둔 보험금 4억 원도 나왔는데, 그걸 우리가 어디다 써요, 진아 것인데. 그래서 그 돈은 다니던 교회의 부목사가 새로 교회를 세우도록 헌금했어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기부는 우선은 돈을 쓰는 일이지만 결국은 마음을 쓰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끝났다고 절망하지 않았다. 딸의 이름을 내건 도서관으로 새로 시작했고, 다른 시작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도서관을 지은 한 교수는 10년 전 생애 처음으로 이 도서관의 설계 공모에 당선돼 올해엔 경북 영주의 도서관도 짓게 됐다. 이 도서관장도 11년의 신문기자 경력 후 도서관 근무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도서관장 공모에 지원해 초대 관장이 됐다.

○ 동네 주민과 함께하는 도서관


“진아 아버님은 매년 도서관 개관 기념행사 때 아이들에게 독서왕 시상식을 해주세요. ‘또 다른 이진아’들을 흡족해하시면서. 그런데 가시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요. 저 뒷모습을 기억해야겠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은 도서관이니 전 그저 어머니의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10년 전 도서관장 공모 때 냈던 운영계획서를 자주 꺼내 보며 초심을 점검합니다.”(이 관장)

“10년 전 도서관을 설계할 때 아이들이 네 살 쌍둥이였어요. 그때 이 대표님이 먹을 걸 들고 자주 찾아와 주셔서 여쭤봤어요. 조카뻘인 제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으시냐고. 그랬더니 말씀하셨어요. ‘가족에게 잘하세요.’ 그 아이들이 이제 중학생이 됐어요.”(한 교수)

이진아기념도서관의 모토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발전하는 도서관’이다. 도서관에서 6개월간 무료로 동화구연을 배우면 향후 1년간 도서관에서 무료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동화 구연가’ 주민들이 탄생했다. 도서관 서비스 수용자가 공급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장애인 등 소외층도 보듬는다. 지난주부터는 다문화 가족을 대상으로 다문화 해설사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마을 공동체의 돌봄을 강조하는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가 이 도서관을 치켜세우는 이유다. 올해 9월 10주년 개관 기념행사에서는 그동안 주민들의 추억을 담은 사진과 문집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 대표를 인터뷰하고 싶어 현진어패럴 사무실 번호를 찾아 무작정 전화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일이 뭐 있다고요. 하루만 더 생각해도 될까요?” 전화를 끊고도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그 ‘아버지’의 온화한 목소리가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대표님, 왠지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10년간 잘 큰 도서관의 공(功)을 주변으로 돌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김선미 기자
김선미 기자
“지금쯤 은퇴했을 거라고 10년 전엔 상상했어요. 하루 용돈 3만 원을 받아 지하철 타고 도서관에 와서 아이들 과자 사주고, 쓰레기 주울 거라고. 그런데 오래 사는 시대가 돼서 좀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웃음)”

―이진아기념도서관 10년. 끝으로 진아 씨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보고 싶고, 그립다고. 아빠는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우리 진아가 하늘에서 돌봐주고 있나 보다고. 이젠 내 딸, 진아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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