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창래 씨(41)는 최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새 장편소설 ‘이런 만조에(On Such a Full Sea)’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 소설은 계급이 엄격하게 구분된 미래의 미국에서 중국 이민자 출신 10대 소녀 ‘팬’이 사라진 남자 친구와 동생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미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기와 물이 오염돼 거주지를 옮겨야 하고, 계급의 분리는 빈부격차로 이어져 갈등을 빚게 된다. 이 씨는 이 소설의 모티브에 대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을 온종일 하는 것을 보고 ‘현실에 묻혀 상상력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며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과 희망,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미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다. 1995년 장편 ‘네이티브 스피커’로 등단한 그는 헤밍웨이상, 펜 문학상, 아메리칸북어워드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도 가능하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의 새 소설은 종전의 문학적 이력과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 소설 주제도 한국적인 시각에 붙잡혀 있지 않고 보편적인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나’의 고민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로
뉴욕타임스의 서평 역시 이창래 씨의 변화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1월 이 씨의 ‘이런 만조에’에 대해 이례적으로 2편의 비평 기사를 실었다. 한 편은 호평, 한 편은 혹평에 가까웠지만 공통된 의견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는 것이었다. 미래소설이라는 형식도 파격적이지만 주제의식에 대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등단작 ‘네이티브 스피커’는 한국계 이민자가 미국 뉴욕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한국과 미국의 경계에 놓인 사람의 고뇌를 탐색했다. 1999년작 ‘제스처 라이프’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동원된 위안부 문제를 다뤘으며, 2011년작 ‘생존자’에서는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온 이민자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자신도 이민자의 아들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왔지만, 최근작에서는 ‘나’의 고민에서 벗어나 빈부격차와 환경오염 같은 세계적 이슈로 시야를 넓히고 있다.
보편성에 관심을 돌리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는 이창래 씨만이 아니다. 지난해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이달의 책’(7월)에 선정된 소설 ‘나의 교육(My Education)’의 저자는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러시아계 유대인인 작가 수전 최 씨(45)다. ‘나의 교육’은 대학원생 레지나가 교수의 아내인 마사와 동성애를 벌이는 내용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양 축인 이성과 감성의 문제를 다뤘다.
최 씨의 1998년 데뷔작 ‘외국인 학생’을 돌아보면 작가의 변화가 한눈에 보인다. ‘외국인 학생’의 주인공은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전쟁 중에 심한 고문까지 받았던 한국인 안창이다. 안창은 미국의 작은 마을 스웨니에서 유학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지닌 미국인 여성을 만나 서로의 아픔을 보듬게 된다. ‘외국인 학생’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문장을 보여준다’는 문학적 성과와 더불어 ‘전쟁에 의해 붕괴된 조국의 악몽으로부터 탈출한 젊은 한국 남성에 대한 탐구와 묘사가 풍부하다’고 짚었다.
작가는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발표한 ‘미국여자’(2004년)에서 미국의 언론재벌 허스트 가의 딸이 극좌파에 납치됐던 1974년 사건을 소설화하면서 소재의 외연을 넓혔다. 이어 선보인 ‘나의 교육’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성과 감성 중 어느 것이 우선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천착한다. ‘미국여자’는 “미국 사회의 급진적 경향이 고조되는 시점과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뉴욕타임스), ‘나의 교육’은 “예술과 문자 분야에 아주 똑똑해도 사람 마음에 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선 바보에 가까운, 교양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양 있는 소설”(아마존 평론가 새라 넬슨)이라는 평을 받았다. 최 씨를 미국 문단에 알린 ‘소수자의 정체성’이라는 문학적 성격이 탈색된 분위기다.
또 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린다 수 박 씨의 이력도 보편성이라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 박 씨는 2002년 아동문학계의 노벨문학상으로 꼽히는 뉴베리상을 수상한 작가다. 그는 ‘널뛰는 아가씨’(1999년) ‘연싸움’(2000년) 같은 동화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으며 ‘사금파리 한 조각’(2001년)으로 뉴베리상을 거머쥐었다. 17세기 조선의 호기심 많은 양반댁 규수 옥화의 세상 체험기인 ‘널뛰는 아가씨’나 연날리기를 통해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는 ‘연싸움’, 고려시대 청자를 만드는 도공의 혼을 그린 ‘사금파리 한 조각’ 등 그의 동화는 ‘한국적인 것’에 뿌리를 뒀다. 그랬던 박 씨가 2011년 선보인 ‘우물 파는 아이들’에서는 마실 물을 긷기 위해 날마다 8시간을 연못까지 걸어야 하는 소녀 ‘니아’의 이야기를 통해 아프리카 수단이 처한 비극을 보여준다. 작가의 눈이 지구상의 고통 받는 아동들의 문제로 선회한 것이다. 세계화와 함께 진행된 경계 허물기
한국에 뿌리를 두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이 같은 변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작가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계 미국인 작가도 차별화 전략으로 이런 코스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미국의 한인 작가들은 우선 평론가와 독자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한국적 소재를 다룸으로써 이름을 알린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해외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임프리마코리아 에이전시에서 일하다 현재 한국문학을 해외에 출판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작가들이 고민의 반경을 넓히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와 나라와 문화를 보고, 국경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 다른 문화와도 연결지으면서 문제의식의 폭이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의 시선이 이렇게 확장되는 시점이 대개 2000년 이후라는 점도 흥미롭다. 재니스 리, 알렉산더 지 등 2000년대에 등장한 외국의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적인 것’에서 벗어난다. 홍콩에서 태어나 영어로 소설을 쓰는 한국계 작가 재니스 리 씨는 2009년 낸 첫 소설 ‘피아노 티처’에서 195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알렉산더 지 씨는 2002년 발표한 첫 소설 ‘에든버러’에서 성적 트라우마를 지닌 동성애자 주인공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한국계’라는 자의식에서 자유로운 것은 이 작가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재니스 리 씨는 ‘피아노 티처’ 출간 당시 방한 인터뷰에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읽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물론 배경도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면서 자신의 소설이 국경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계 독자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밝혔다. 수전 최 씨도 책이 출간될 때마다 “아시아계 아메리칸 작가로 편협하게 규정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미국 사회의 젊은 작가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강조해왔다. 윤여탁 서울대 교수는 2011년 한국어교육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한국문학의 세계화 제문제: 지표와 전망’에서 “신기술의 영향력 확대와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민족문학 또는 국민문학의 경계 허물기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1년 미국에서 초판 10만 부를 찍으면서 커다란 화제를 모은 신경숙 씨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가 전 세계에 호소력을 갖는 ‘모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엄마를 부탁해’에 이어 미국에서 출판된 조경란 씨의 ‘혀’는 관능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며, 일본에서 2쇄 출판에 들어간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도 인간 영혼의 근원적 상처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2013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출판사 갈리마르의 세계문학총서 중 한국소설로 유일하게 선정된 이승우의 ‘그곳이 어디든’ 역시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현대인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한국 문학의 해외 출판을 맡고 있는 대산문화재단의 곽효환 팀장은 “자기만의 문제, 혹은 영토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의식을 탐구하는 것이 국내 작가들과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에게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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