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ISSUE]“피좀 줘요” 차라리 드라큘라 복장을 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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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2 , 현장에 가다… 권기범 기자의 헌혈권장원 체험

2일 오후 기자는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헌혈권장원 조끼를 입고 행인들에게 헌혈을 권했다. 겨울바람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볼은 얼얼했고, 입술은 하얗게 텄다. 그나마 “헌혈하고 가라”고 말하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웃어 보이는 학생들이 위안이 됐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일 오후 기자는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헌혈권장원 조끼를 입고 행인들에게 헌혈을 권했다. 겨울바람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볼은 얼얼했고, 입술은 하얗게 텄다. 그나마 “헌혈하고 가라”고 말하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웃어 보이는 학생들이 위안이 됐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우연이었다. 거의 1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 살 어린 후배를 평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기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복장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었을까. 기자는 잘 차려입은 정장 위에 코트를 입고, 그 위에 ‘헌혈로 사랑을 전하세요’란 문구가 적힌 얇은 노란색 조끼를 덧입고 있었다. 헌혈권장원 차림이었다. 》
그의 어깨를 덥석 짚었다. 놀란 동생을 향해 웃어보였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고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바빠?” “아뇨.”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헌혈권장원 체험 10분 만에 첫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헌혈의 집 입구 엘리베이터에 선 그가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헌혈을 꼭 해야 돼요?”

“왜? 요즘 약 먹니? 어제 술 마셨어? 몸이 안 좋니?”

“아뇨. 헌혈하면 그날 술을 못 마시잖아요. 바늘이 무섭기도 하고.”

착한 인상의 후배가 한없이 얄미워졌다. 그를 보내고 나니 앞이 깜깜했다. ‘친한 사람도 헌혈의 집에 못 데려가는데 어떻게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헌혈하게 만들 수 있을까.’

명동 중심에서 헌혈을 외치다
헌혈권장원 체험을 한 2일에는 최저기온이 영하 13.5도나 됐다. 기자가 ‘대한적십자사 명동 헌혈의 집’을 찾은 오후 3시에도 온도계는 영하 9.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게다가 건물 사이에 쌓여 있던 지난밤 내린 눈이 날카로운 바람에 흩어져 머리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겨울이니까 따뜻한 패딩점퍼라도 한 벌 주겠지.’ 하지만 이날 함께 권장 활동을 한 강영애 씨(55·여)가 내민 것은 얇은 천으로 된 조끼 하나뿐. 장갑도 가져오지 않아 흰 장갑 두 켤레를 겹쳐 껴야 했다.

강 씨와 함께 명동 헌혈의 집 앞 골목길로 나왔다. 막상 눈에 띄는 노란 조끼를 입고 서니 조금 전 ‘이까짓 것’ 하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강 씨가 말했다. “뭐 특별한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헌혈 하고 가세요’ ‘헌혈은 사랑입니다’ 같은 뻔한 멘트를 하는 거죠. 길고 어려운 말은 지나가는 시민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해요.”

기자는 ‘도전! 나도 헌혈’이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헌혈하세요”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색함이 사라지자 작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래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연습도 할 겸 기자 혼자 명동거리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광고 전단을 나눠주는 몇몇 사람과 엉겨 서서 다시 “헌혈하고 가세요”를 외쳤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기자를 향해 흘깃대는 사람들을 능청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헌혈하고 가세요”라는 딱딱한 멘트는 “거기 잘생긴 학생, 헌혈하고 가” “봉사활동 시간도 준대요” “헌혈하고 ‘무한도전 달력’ 받아가세요(‘무한도전 달력’ 제공 이벤트는 6일 끝난다)”로 바뀌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무리 몇몇이 눈길을 주는 듯했지만 발길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시 20여 분이 지났다. 구두를 신은 발이 아려오기 시작할 즈음, 기자의 피켓을 유심히 지켜보며 지나간 한 20대 남성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드디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저…. 피켓을 거꾸로 들고 계신데요.” 창피했지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서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헌혈 한 번….”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이미 종종걸음 치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첫 번째 성공 기회는 또 물 건너갔다.

결국 한 시간여 동안의 활동 실적은 0명이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피켓 지적남’을 비롯, “명동의 메인 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고 묻는 일본인 관광객 한 명, “저는 일주일 전에 헌혈을 해서요”라고 말해준 30대 남성 한 명, 그리고 헌혈을 포기하고 돌아간 후배, 4명뿐이었다.

관상을 잘 봐야 한다?
기자가 허탕을 치는 사이 강 씨는 3명의 행인을 헌혈의 집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 콘택트가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요. 왜 도움을 요청할 때는 특정인을 쳐다보면서 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강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보기만 해도 (누가 헌혈을 할 사람인지) 안다”고 했다.

“그럼 저랑 눈이 마주치는 사람을 붙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강 씨가 또 고개를 저었다.

“일단 사람을 잘 골라야죠. 헌혈이 불가능한 어린아이와 술 취한 사람은 피해야죠. 그 다음, 헌혈을 하고 싶지만 쑥스럽거나, 다른 이유 때문에 헌혈의 집을 찾지 못했던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런 분들이 헌혈에 동참할 확률이 높죠.” 그의 말을 믿고 다시 시민들의 얼굴을 유심히 봤지만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경력 15년인 그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헌혈권장원 활동의 복병은 따로 있다. 강 씨는 권유활동을 시작하기 전 기자에게 “서 있을 때 가게 문을 막고 서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귀띔했다. 명동 헌혈의 집 근처에는 상가가 많이 있는데, 권장원이 입구를 막고 서 있으면 영업에 방해가 돼 매장 주인이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활동 초창기에는 권장원과 주변 상인의 멱살잡이도 더러 있었다. 김형섭 대한적십자사 헌혈진흥팀 과장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 헌혈권장원이 길 한가운데 서있으면 ‘상가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불평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꼭 할게요’라고 말해주세요”
“아주머니께서 제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지나치기 어렵잖아요. 이번이 8번째 헌혈이라서 거부감도 없고요. 시간 여유도 좀 있어서 못이기는 척 따라왔죠. 예전에도 여자친구와 함께 와본 적이 있어요.”

이날 강 씨의 손에 이끌려 헌혈을 한 김태욱 씨(20·대학생)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헌혈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전형적인 ‘헌혈 세대’다. 우리나라 연간 헌혈자 중 16∼29세 비율은 전체의 79.5%(2011년 기준)나 된다. 권혜란 대한적십자사 헌혈진흥팀장은 “20, 30대 연인이나, 여러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중고교생들이 헌혈 권유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헌혈자 수는 연말(11, 12월)에 늘었다가 이듬해 초(1, 2월)에는 줄어드는 패턴을 반복한다. 2011년과 2012년 1월의 헌혈자 수는 그 이전 달보다 각각 1만6000여 명, 1만4000여 명씩 줄었다. 권 팀장은 “연말 분위기가 사라지는 데다 날씨가 추워져 길에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비축 혈액량이 정상 수준으로 유지되려면 하루 7000여 명의 헌혈자가 필요하다. 2011년 2월에는 월 헌혈자 수가 18만여 명(하루 평균 6600여 명 수준)에 그쳐 관계자들이 긴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것. 최근에는 혈액이 부족한 ‘보릿고개’가 잦아지고 있다.

혈액이 모자라도 대한적십자사가 강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회단체와 군부대 등에 단체 헌혈을 요청하거나 방송 화면에 도와달라는 내용의 자막을 띄우는 정도다. 김형섭 과장은 “예전과 달리 단체헌혈의 비중은 약 30%로 많지 않다. 비축 혈액량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나머지 10분의 7을 차지하는 개인 헌혈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눈이 마주친 뒤 고개를 돌려 사라지기 전까지 몇 초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시간의 전부인 강 씨는 사람들에게 긴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길을 걷다 헌혈권장원을 만나면 꼭 눈을 맞춰주세요. 당장 헌혈이 힘들 때는 ‘다음에 꼭 할게요’란 말만 건네줘도 고맙죠. 가끔 시간을 내 흔쾌히 헌혈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추워도 힘든 줄을 모르겠어요.”
▼ 100번 헌혈 땐 사진넣은 투명큐브 줍니다 ▼

헌혈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래서 헌혈을 할 때 주는 손톱깎이 세트, 여행용 세면도구, 외식상품권, 우산, 화장품 등은 모두 ‘상품’이 아니라 ‘기념품’이라고 부른다. 뜻깊은 헌혈의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해주길 바라는 의미다. 요즘엔 ‘기부권’이란 것도 있다. 복지단체에 특정 금액을 기부할 수 있는, 일종의 자선 쿠폰이다.

헌혈을 꾸준히 하면 기념품보다 더 좋은 걸 받을 수 있다. 헌혈을 30번 하면 헌혈유공장 은장(사진 2)을, 50번 하면 헌혈유공장 금장(사진 1)을 받는다. 이는 대한적십자사 포장운영규정에 따라 수여되는 정식 포장(훈장에 다음가는 휘장)이다. 포장증도 함께 준다. 헌혈이 100회를 넘으면 정육면체 모양의 투명 큐브에 당신이 헌혈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오른쪽)과 이름을 새겨준다. 헌혈을 한 번 하면 기념품을 받지만, 헌혈을 많이 하면 ‘명예’를 받게 되는 것이다.

kaki@donga.com
#O2#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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