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와 망백의 화업 열정… 그들에게 경의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1일 03시 00분


한국 현대미술의 산 역사 90대의 현역 한묵-백영수 화백

한묵 화백의 개인전에 나온 ‘상봉’(1993년). 현란한 색채와 선이 어우러지며 광활한 공간의 울림과 생명력을 드러낸다. 갤러리 현대 제공
한묵 화백의 개인전에 나온 ‘상봉’(1993년). 현란한 색채와 선이 어우러지며 광활한 공간의 울림과 생명력을 드러낸다. 갤러리 현대 제공
《 “나이를 잊어버리고 있다. 100세니 90세니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살고는 있지만 어떤 의미에선 우리 모두는 죽을 사람이거든. 누구나 죽음이란 것은 다 만나는 것이니 미리 생각할 필요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한국 기하추상의 거목인 한묵 화백(98·본명 한백유)은 ‘우리 나이로 백수(白壽)를 맞은 지금 행복한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에서 열리는 개인전(22일∼9월 16일)을 앞두고 간담회에 나온 노화백. 귀가 어두운 탓에 부인 이충석 씨가 대신 이야기를 전했으나 이때만큼은 또렷한 목소리로 삶에 대한 성찰을 들려주었다. 》
한묵 화백
한묵 화백
1940년대 말∼50년대 초 ‘신사실파’ 동인으로 현대미술 태동기에 활동한 백영수 화백(90)의 건재도 반가운 소식이다. 50대의 나이에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갔던 그는 지난해 영구 귀국해 경기 의정부시에서 살고 있다. 12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낯선 땅에서 험난한 길을 개척한 두 원로, 전시를 계기로 이들의 존재를 미술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내일부터 한묵展-우주 공간의 울림


한묵 화백은 1961년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자기 혁신을 위해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다. 프랑스로 건너간 지 51주년을 맞아 마련된 전시엔 미공개작 4점을 포함, 1950년대 초기작부터 2000년대 작품까지 시대별로 유화 40여 점이 나왔다. 생애 첫 화집도 출간했다. 심장 수술을 받은 뒤 2005년경 붓을 놓은 그가 2003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이후 10년 만의 개인전이다. 국내 추상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이자,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고 새 지평을 개척한 미술사의 산증인이 걸어 온 길을 되짚는 기회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 화백은 1969년 인간의 달 착륙을 계기로 우주적 공간에 시간의 개념을 더한 4차원의 세계를 어떻게 2차원 평면에 구축할 것인지를 평생 화두로 선택한다. 남다른 서예 실력으로 유명한 화가는 마침내 동양적 정신세계와 기하추상이란 서양의 이성적 합리적 방법론을 접목한 동서 융합의 그림을 완성했다. 지그재그로 소용돌이치는 3원색의 동심원이 자리한 캔버스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듯 눈부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의 도전이라고 본다”는 화가의 지론처럼 보이지 않는 우주공간의 속도와 울림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업이다.

30여 년 파리에서 살다가 지난해 영구 귀국한 백영수 화백의 ‘해바라기’(2012년). 온화한 울림이 담겨 있다. 백영수화백제공
30여 년 파리에서 살다가 지난해 영구 귀국한 백영수 화백의 ‘해바라기’(2012년). 온화한 울림이 담겨 있다. 백영수화백제공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작업에 자극을 받기 위해 프랑스행을 선택한 뒤 청소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에 매달렸지만 집 없이 떠도는 궁핍한 삶은 계속됐다. 그림에 빠져 환갑을 넘겨서야 결혼한 부인 이 씨는 말했다. “우린 이방인으로 평생을 살았다. 고아같이.” 하지만 그의 올곧은 삶은 파리를 거쳐 간 많은 미술인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유학 시절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지호 대전 이응노미술관장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작가이자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분”이라고 말했다.

12월 예정 백영수展-소박한 낙원의 풍경


백영수 화백
백영수 화백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규상 이중섭이 결성한 ‘신사실파’는 국내 추상미술의 싹을 틔운 동인 그룹이다. 이들 중 유일한 생존 작가인 백 화백의 회화에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엄마 품에 안기거나 등에 업힌 아기 등 소소한 일상을 간결한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은 가족, 집, 자연이 어우러진 소박한 정경을 낙원처럼 그려 낸다.

1989년 교통사고, 1994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긴 뒤 올해 우리 나이로 망백(91세)을 맞은 노화가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부인 김명애 씨는 전화 통화에서 “전시 앞두고 더 젊어지는 것 같다. 100∼120호짜리 작품을 시작한 뒤 날마다 조금씩 그리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미술#전시#한묵 화백#백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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