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발이 내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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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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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발과 작은 발, 가는 발과 볼이 넓은 발, 망가지고 상한 발, 그리고 가끔 윈저 공작부인과 수전 헤이워드의 발처럼 완벽한 발도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의 발이 나를 거쳐 갔고 내게 말을 걸었다.’

- ‘살바토레 페라가모’
“아아, 신고 나갈 구두가 없어!” 매일 아침 신발장을 열기 전 내가 상상하는 건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캐리가 결혼 선물로 받은 슈즈룸-수백 켤레는 족히 들어갈 만한 공간을 빛이 투명하게 비추고, 가운데 검은 하이힐이 놓여 있는!-이다. 하지만 현실의 신발장은 개그콘서트의 ‘풀하우스’와 비슷한 형상이어서, 이런 아이도 있었지, 하며 구두 스트랩을 하나 당기면 나도 나도 하고 힐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군다.

모든 쇼퍼홀릭은 슈어홀릭(신발 마니아)이고, 물론 나도 그렇다. 게다가 오존층도 뚫을 듯한 킬힐에 심히 중독돼 있다. 높이에 홀리면 땅으로 내려오기 어렵게 된다. ‘좋은 구두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슈즈업계의 풍수마케팅을 믿을 만큼 순진한 건 아니다. ‘건축적 힐의 미학’ 운운도 이제 부끄러운 줄 알겠다. 그냥, 아름다운 구두를 신은 발이 아름답기 때문에, 갖고 싶다.

발과 얼굴은 세상에 드러낸 몸이다. 얼굴이 규범이고, 이성적이며, 의례적인 호칭이라면 발은 야성이고, 섹시한 몸이고, 솔직한 욕망이다. 얼굴이 계(戒)의 영역이라면 발은 색(色)에 속해 있다. 그 중간쯤에 손가락이 있지만 기계 자판에 부러진 손톱과 종이에 베어 너덜대는 손끝은 사무적인 악수와 너무나 어울려 와락, 눈물이 솟을 정도다.

유전된 골상과 눈빛, 화장술로 얼굴이 말을 걸듯, 발은 족근골(발목뼈)과 다소 야윈 피부와 발톱으로 상대에게 말을 건다. 발을 대하는 눈은 얼굴을 보는 눈(성형외과 견적과 연예인 캐스팅을 목적으로 하는)에 비해 오염이 덜 된 듯하다. 덜 자본주의적이면서 더 사적이다. 맨발에서 그(그녀)의 얼굴이 차마 못한 고백을 듣는다. 발등 위의 애무가 다른 무엇보다 에로틱한 건, 맨살의 이야기, 시선 밑에서 벌어지는 쾌락의 은밀함 때문일 거다.

발은 세상의 속도를 좇는 고단함을 털어놓는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화려한 스타 시스템에 가려진 여배우들의 한숨과 고뇌를 누구보다 잘 들었다. “발이 내게 말을 걸었다”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 나막신 때문에 동네 청년들의 놀림을 받고 슬픔에 빠진 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였으니. 가난한 농부 페라가모의 열네 남매 중 열한 번째였던 살바토레가 버려진 가죽으로 최초의 ‘페라가모’를 만들었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살바토레는 신발의 구조에 최초로 해부학을 도입하고 끊임없이 혁명적인 소재(코르크, 낚싯줄 등)와 디자인을 내놓았다. 오드리 헵번, 메릴린 먼로 같은 스타들이 그에게 발을 맡긴 건 그저 ‘유명 브랜드’라서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페라가모가 ‘과시용 브랜드’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건 정말 유감이다. 한때 아이보리 스타킹에 페라가모 구두, 페라가모 헤어밴드를 한 여자들과 3초에 한 번씩 마주쳤다. 열두 쌍둥이처럼 똑같은 차림도, “나 명품 신은 여자야!”라고 외치는 눈빛도 싫었다. 예전에 나는 미국 디자이너 톰 포드가 머물던 시절의 구치 하이힐에 미쳐 있었다. 당시 구치의 스틸레토힐들은 SM(사도마조히즘)적 상상력을 도발할 만큼 섹시하면서도 우아했다. 나의 ‘하이힐 잔혹사’도 이로 인했다.

지금은 한류스타가 된 한 남자 배우가 신인이었을 때, 나는 구치의 하이힐을 신고 인터뷰했다. 그의 시선이 내 발에서 멈췄다.

와! 이렇게 긴 발가락, 처음 봐요. 가끔 길고 울퉁불퉁한 내 발가락들을 보며 생각한다. 지금 내가 그의 매니저 연락처도 갖고 있지 못한 게 못생긴 발 때문은 아닐 거라고. 그날 그의 말이 내 발가락이 원숭이의 그것과 닮았다는 뜻(만)은 절대 아니었을 거라고.

消波忽溺 그녀 앞에서 쇼퍼홀릭을 비난하지 마세요. 물어요.

holden@donga.com
#살바토레 페라가모#이 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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