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꽃과의 대화]고개 숙인 한국의 야생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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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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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나비에게 꽃가루 듬뿍 묻히고, 자가 수정에도 유리

시계방향순으로 초롱꽃, 섬말나리, 원예종 백합,  캄파눌라.
시계방향순으로 초롱꽃, 섬말나리, 원예종 백합, 캄파눌라.
필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절을 한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몸의 여러 관절을 굽히며 고개를 숙인다. 이런 반복적인 동작은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특히 세상의 모든 사물에 나의 몸을 낮추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 살포시 고개 숙인 금강초롱꽃

요즘 우리나라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주변에서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 야생화는 서양의 화초와 달리 고개를 숙이고 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초여름이 되자 피기 시작한 초롱꽃과 매발톱꽃, 친척인 백목련과 달리 사람이 보기에 적당한 높이에서 아래를 향해 피는 함박꽃나무, 조금만 있으면 필 나리류가 모두 다 그렇다. 참, 할미꽃도 빼놓을 수 없다. 4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피었던 할미꽃은 어느덧 털이 달린 씨앗을 가득 품고 있다.

우리네 속담 중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잘난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을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겨 왔다. 이렇게 겸허하게 고개를 살며시 숙이는 우리네 정서는 어쩌면 야생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많이 수집해놓은 어느 식물원의 로고가 살포시 고개 숙인 금강초롱꽃이란 게 떠오른다. 그 식물원의 이미지를 참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꽃이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보통 식물 꽃의 생태적 특성은 주로 매개곤충에 대한 적응에서 생긴다고 본다. 고개를 숙인 꽃의 생태학적 장점은 다음의 4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① 벌 같은 매개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많이 묻게 할 수 있다.

② 매개곤충이 적을 경우 암술이 자신의 꽃가루를 받아 수정(중력의 작용을 생각해 보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우리 야생화는 대부분 자가 수정이 가능한 자가화합성이다).

③ 특정 매개곤충의 경우 더 유인이 잘된다.

④ 빗물로부터 꽃가루가 보호를 받는다.

우리나라의 장마철에 피는 나리류는 확실히 고개 숙인 꽃을 피우는 것이 꽃가루 보호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 한편, 할미꽃의 경우 미국식물학회 발표논문(중국과 미국 연구자의 자료)에 따르면 물기에 약한 꽃가루를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그런데 개화기(4월)에 건조한 우리나라 기후에서 그 설명이 맞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재미있게도 이런 고개 숙인 꽃들이 서양에서 육종되면 모두들 나보란 듯이 빳빳하게 고개를 위로 쳐든 모습이 된다. 초롱꽃과 비슷한 생김새의 캄파눌라나 서양매말톱, 서양할미꽃 같은 서양 원산의 ‘사촌’들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꽃의 속살인 수술과 암술을 밖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관상원예학에선 이렇게 위쪽을 향해 꽃을 피우는 품종을 선호해 왔다. 관상의 주체인 사람들에게 꽃의 모습을 좀 더 확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에 따라 신품종을 육종할 때도 위로 피는 꽃을 선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히 드러나는 암술과 수술이 사실은 꽃의 ‘성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 머쓱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세상일이 모두 그러하듯이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놓는 것은 싫증을 부르기 십상이다. 사람은 외부의 계속되는 자극엔 결국 무뎌지게 마련이다. 여성 패션에서는 화려하게 드러내놓는 것과 감추는 것이 교차하며 유행을 선도한다. 이런 것은 꽃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며 적나라하게 자신의 속살까지 드러내는 게 아름다울 때도 있다. 하지만 다소곳이 고개 숙인, 그리하여 꽃잎 안이 보일까 말까한 야생화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이런 모습은 화려함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korea.kr
#야생화#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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