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야만 속에서 핀 절절한 사랑의 꽃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8일 03시 00분


■ 연극 ‘살고 싶다…’ ★★★★

미지씨어터 제공
미지씨어터 제공
문화예술계에 1980년대 바람이 거세다. 영화계에선 지난해 ‘써니’에 이어 올해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1980년대 바람을 이어가고 있다. 연극계에도 그런 작품이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범죄와의 전쟁’ 배경이었던 부산의 미지씨어터가 제작한 연극 ‘살고 싶다, 그림처럼, 시처럼’(양지웅 작·연출)이다.

지난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희곡상 남녀연기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은 서정적 대본과 뛰어난 연기 앙상블에 힘입어 서울 무대로 진출했다.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 이 연극은 1980년대 초 서울의 한 허름한 시장통을 배경으로 누추하지만 사람 냄새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통금시간 손전등을 들고 순찰을 도는 경찰관(정원혁)의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는 엄포가 일상이 된 시대이고, 술에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억압의 시대지만 연극 속 인간 군상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너무도 해학적이다.

백수건달로 술에 절어 살면서 툭하면 손가락을 내밀며 “일단 담배 하나만 줘봐”를 되뇌는 개망나니 꼴통(김윤호), 시장 잡놈들과 어울려 술장사를 하며 아무도 못 건드리는 꼴통을 개 패듯 패는 옥이네(윤소희),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씨(김인하), 강변가요제에 나가겠다며 매일 기타를 튕기면서도 ‘아침이슬’을 모르는 날라리 대학생 태만(윤현덕), 뭐든 땅에 떨어뜨린 뒤 주워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소녀(이유경)….

가장 놀라운 점은 이들 중에서 가장 주변부적 존재인 꼴통과 거지소녀가 극의 주인공이란 점이다. 제대로 의사소통이나 가능할까 의심스러운 두 캐릭터가 서로만의 화법으로 시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압권에 가깝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감옥의 역사’가 천상병의 시와 함께 동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광인과 거지의 사랑을 통해 ‘야만의 시대’로 기억하는 1980년대가 한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인지를 일깨워주는 역설적 작품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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