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군자의 표상이 서민 눈엔 ‘목이 긴 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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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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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19세기 말∼20세기 초)’,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 민화 속의 물상들은 모두 다 즐거움에 휩싸여 있고, 그들에게서 위엄이나 권위는 찾아볼 길이 없다. 봉황에 대한 서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봉황(19세기 말∼20세기 초)’,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 민화 속의 물상들은 모두 다 즐거움에 휩싸여 있고, 그들에게서 위엄이나 권위는 찾아볼 길이 없다. 봉황에 대한 서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잘 알려진 김선달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김선달이 장 구경을 하다가 닭을 파는 가게 옆을 지나게 됐다. 마침 닭장 안에는 유달리 크고 모양이 좋은 닭 한 마리가 있어서 주인을 불러 그 닭이 ‘봉(鳳)’이 아니냐고 물었다. 봉황 가운데 수컷을 봉이라 부르고, 암컷을 ‘황(凰)’이라 일컫는다. 김선달이 짐짓 모르는 체하고 계속 묻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닭 장수가 봉이 맞다고 대답했다. 비싼 값을 치르고 그 닭을 산 김선달은 원님에게 달려가 그것을 봉이라며 바쳤다. 화가 난 원님이 김선달의 볼기를 쳤다. 김선달이 원님에게 닭 장수에게 속아서 샀다고 하자, 닭 장수를 대령시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결국 김선달은 닭 장수에게 닭 값은 물론 볼기 맞은 값으로 많은 배상을 받았다. 닭 장수에게 닭을 ‘봉’이라 속여 이득을 보았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봉이 김선달’이라 불렀다.》
상상 속의 동물, 봉황

봉황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처럼 여러 동물의 조합으로 이뤄졌다. 문헌마다 봉황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다르지만 대략의 모습은 추정할 수 있다.

중국 후한시대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앞모습은 기러기, 뒷모습은 기린이고, 이마를 보면 원앙이며, 용의 무늬에 거북의 등이고, 제비의 턱에 닭의 부리 모양이며, 오색(五色)을 갖추었다’고 기록돼 있다.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 ‘이아(爾雅)’ 가운데 서진(西晋)의 곽박(郭璞)이 단 주를 보면 ‘봉황은 닭 머리, 제비 턱, 뱀 목, 거북 등, 물고기 꼬리의 모양이고, 오채색에 높이가 6척이 넘는다’고 묘사돼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지만 닭 이미지(특히 머리 부분)가 근간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봉황과 닭을 혼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MB정부가 들어서면서 권위주의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대통령 문장(紋章)에서 봉황을 없앴다. 오랫동안 9시 뉴스 속에서 친숙했던 대통령의 봉황 문장이 화면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훌륭한 임금이 통치를 잘해 세상이 태평할 때 출현했던 동물이 봉황이다. 봉황은 용과 더불어 통치자를 상징한다. 하지만 실제 쓰임에 있어서는 왕후나 신하처럼 낮은 등급의 문양으로도 사용돼 대통령 문장으론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군자는 진퇴를 알고 자기관리 엄격해야
전설에 의하면 봉황이 우는 소리는 퉁소를 부는 소리와 같고, 살아있는 풀과 벌레를 먹지 않으며, 그물에 걸리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醴泉·세상이 태평할 때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과 같이 좋은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으며, 날아갈 때 뭇 새들이 뒤따른다고 한다. 새들의 우두머리인 봉황은 고고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봉황의 모습은 고고함은 물론이고 화려하고 세련된 자태를 자랑한다. 19세기 궁중 화원으로 활동했던 조정규(1791∼?)의 ‘봉황’(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대표적이다. 그림 속 봉황은 닭 모양의 머리에 긴 볏을 스카프처럼 휘날리고 몸의 깃털은 아홉 빛깔은 아니지만 색색이 물들어 있으며, 공작처럼 긴 꼬리를 찬란하게 펼치고 있다. 바위 위에서 가는 다리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는 통치자의 여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봉황(조정규,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후기 궁중 화원이었던 조정규의 봉황도는 고고한 자태와 화려한 위용이 돋보인다(왼쪽). ‘염자도(19세기)’, 선문대박물관 소장. 글자를 형상화한 문자도에서는 봉황이 고고한 기대를 의미하는 ‘염’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봉황(조정규,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후기 궁중 화원이었던 조정규의 봉황도는 고고한 자태와 화려한 위용이 돋보인다(왼쪽). ‘염자도(19세기)’, 선문대박물관 소장. 글자를 형상화한 문자도에서는 봉황이 고고한 기대를 의미하는 ‘염’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봉황은 이렇듯 고고한 군자의 표상이었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유교적 덕목으로 구성된 민화 문자도 가운데 염(廉)자를 대표하는 상징이 봉황이다. 군자는 물러날 때를 아는 처세와 절제할 줄 아는 자기 관리의 의지가 필요한데, 이를 염이라 했다. 봉황은 떠나면 천 길을 날고 배가 고파도 좁쌀 따위는 먹지 않는다 했으니, 우리가 그 고고한 기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기개를 잃어버린 채 굶어죽지 않으려 조 따위까지 먹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봉황처럼 처신하는 군자의 행실을 문자도는 교훈으로 전하고 있다. 선문대박물관 소장 ‘염자도’를 보면 첫 획이 커다란 봉황으로 그려지고, 그 봉황의 모습이 나머지 획 위에 깃들어 있다. 봉황의 큰 위세만으로도 염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한낱 ‘군계일학’ 정도의 존재로
그러나 민화 작가들이 그린 봉황그림 중에는 이처럼 고고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자태보다는 마당에 키우는 닭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화에서는 김선달의 일화처럼 닭과 봉황의 차이를 크게 두지 않았다. 구태여 봉황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군계일학(群鷄一鶴)’정도의 존재일 뿐이다.

민화 작가는 어려운 동물의 조합에 따르지 않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닭의 모습에 약간 변형을 가하여 봉황을 나타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봉황’은 기본적으로 닭의 모습에 목만 길게 뽑아 놓은 모습이다. 구불구불한 형상의 매화 가지 위에는 닭 한 마리가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깃들고 있어 봉황과 닭의 연관을 암시한다. 더욱이 여기서 봉황은 더는 고고하지 않다. 흥겨움과 율동으로 가득 차 있다. 순 임금의 음악이 아홉 번 연주되자 봉황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하지만, 이 그림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넘어섰다. 봉황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웨이브 춤을 추듯 격렬하게 목을 교차한다. 하긴, 닭이면 어떻고 봉황이면 어떠한가. 봉황의 존재를 ‘목이 긴 닭’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이 바로 봉황을 바라보는 서민들의 눈높이였던 것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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