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남극 월동연구대 “크레바스를 탈출하라” 필사의 지옥훈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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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월동연구대 극지적응 구슬땀 현장

▲ 26일 오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파인리조트 인공암장에서 다음 달 남극으로 떠날 제25차 세종기지 월동대원들이 크레바스 탈출 훈련을 받고 있다. 용인=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26일 오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파인리조트 인공암장에서 다음 달 남극으로 떠날 제25차 세종기지 월동대원들이 크레바스 탈출 훈련을 받고 있다. 용인=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26일 오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파인리조트 스키장. 초록빛 슬로프를 유유히 활보하는 남자들이 동아일보 주말섹션 ‘O2’에 포착됐다. 이들은 줄에 매달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고, 비탈길에서는 서로의 몸을 묶고 넘어지는 연습까지 한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아 텅 빈 스키장. 어울리지 않게 등산복에 안전모를 쓴 남자들은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일까.

○ 가장 추운 ‘영토’를 지키는 사람들

슬로프를 한참 걸어 올라가 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20대 청년부터 50대 아저씨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하나같이 목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름표에는 본인의 이름과 함께 ‘고층대기’ ‘기상’ ‘중장비’ ‘기계설비’ ‘조리’ 등 전공분야로 보이는 단어들이 씌어 있다.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50대 아저씨에게 먼저 접근했다. 명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인쇄돼 있었다. ‘대한민국 남극세종과학기지 제25차 월동연구대.’

그랬다. 이들은 다음 달 말 한국에서 1만7000여 km 떨어진 남극으로 떠날 세종기지 월동대원들이었다. 50대 아저씨는 월동대장을 맡은 신민철 극지연구소 책임행정원. 우리나라는 1988년 남극의 킹조지 섬에 준공한 세종기지(남위 62도13분, 서경 58도47분)에 매년 월동대를 파견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월동대’이지만 사실상 1년 남짓 남극에 머무르게 된다. 월동대란 이름은 여름에 남극에 들어가 겨울을 나기 때문에 붙었다.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남극엔 12월부터 여름이 시작돼 항공기나 배의 접근이 쉽다. 25차 월동대원 18명은 올해 12월부터 약 13개월 동안 대한민국 최남단 ‘영토’를 책임지게 된다.(국제법상 남극은 특정 국가의 영토일 수가 없다. 그러나 남극기지 운영은 향후 바다 및 지하자원 확보를 위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세종기지 월동만 5번째인 중장비담당 김홍귀 씨(39)는 다른 대원 4명과 함께 선발대로 다음 달 7일 출국한다. 선발대는 월동대의 1년 치 보급품과 하계연구용 장비들을 싣고 최근 출항한 쇄빙선 ‘아라온호’와 칠레 최남단 푼타아레나스에서 합류한 뒤 다음 달 15일쯤 세종기지에 입성한다. 다음 달 26일 출국하는 신 대장 등 13명은 기상이변만 없다면 12월 1일 기지에 도착해 24차 월동대와 공식 임무교대에 들어간다.

최근 한국의 극지연구에는 탄력이 붙고 있다. 한국의 첫 쇄빙선 아라온호는 2009년 진수 후 남·북극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2014년에는 남극대륙에 장보고과학기지(남위 74도37분, 동경 164도13분)가 들어설 예정이다. 신 대장은 “사반세기 간 이어온 세종기지 월동 경험들은 향후 대륙기지 운용의 밑바탕이 될 주요한 자산”이라며 “조금의 빈틈없이 준비해 내년에도 세종기지에서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 훈련만이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현재 세종기지를 지키고 있는 24차 월동대가 헬기를 통해 중간 보급을 받는 모습. 극지연구소 제공
현재 세종기지를 지키고 있는 24차 월동대가 헬기를 통해 중간 보급을 받는 모습. 극지연구소 제공
“팔에 힘주지 말고, 안전띠에 몸을 맡겨요. 주머(jumar·고정로프를 오를 때 사용하는 기구) 너무 당기지 말고!”

나긋나긋하던 교관의 목소리에 어느새 날카로운 힘이 실린다. 실습 중인 월동대원들의 얼굴에서도 덩달아 웃음기가 사라진다. 비록 스키장 한쪽에서 이뤄지는 가상훈련에 불과하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필수다. 얼마 후 남극의 크레바스를 진짜로 만나 지금 배운 ‘티롤리안 브리지(Tyrolean Bridge·협곡이나 격류, 크레바스 등의 양쪽에 고정 조형물을 설치하고 이를 로프로 연결해 건너가는 등반방법)’를 바로 써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한데 모였으니 체격이나 운동능력에도 차이가 나는 법. 티롤리안 브리지 1번 주자로 나선 공중보건의 조경훈 씨(26)는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받은 게 유일한 아웃도어 경험이란다. 로프와 한참이나 씨름하던 그에게 남극에서 어찌 버티겠냐는 타박이 이어진다. “이래 봬도 중간은 가는 체력”이라며 발끈한 그는 “처음 해봐서 그렇다. 자꾸 연습하면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반면 부사관 출신인 기계설비 담당 이상순 씨(37)에게 로프에 매달려 10m 정도를 이동하는 미션은 식은 죽 먹기다. “군 생활을 7년이나 했어요. 이런 거야 많이 해봤죠. 흐흐.”

이날은 24일부터 시작된 ‘제25차 월동연구대 극지적응훈련’ 5일 일정 중 하이라이트로, 극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기본 등반기술에 초점이 맞춰졌다. 오전에 실습한 러닝 빌레이(Running Belay)도 대표적인 설상 등반기술. 위험구간을 지날 때 서로의 몸을 묶어 움직이면서 중간 확보장비에 로프를 통과시켜 한 사람이 추락하더라도 안전하게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법이다.

스키장에서의 실습이 끝난 뒤 월동대원들이 이동한 곳은 리조트 내 인공암장이었다. 이곳에선 불의의 사고로 크레바스에 추락했을 때 자력으로 로프를 타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훈련받았다. 한쪽 방향으로만 위치를 이동시킬 수 있는 프러시크(Prusik) 매듭 2개를 이용해 모든 대원이 8m 높이의 암벽 오르기에 도전했다.

“일어서는 방향을 잘 잡은 뒤에 다리 힘으로 일어서야 해요. 팔 힘으로 하면 빨리 지쳐서 안 돼요. 아셨습니까?”

교관인 원종민 코오롱등산학교 부장의 설명에 허둥대던 대원들도 이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현역군인으로 월동대에서 해상안전을 책임질 주환웅 씨(33)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멋진 포즈로 ‘크레바스 탈출’에 성공해 박수를 받았다. 의욕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버둥거리는 생물연구원 곽민석 씨(25)에게는 ‘응원의 박수’가 쏟아졌다.

대원들은 이 외에도 도르레와 ‘Z’자 로프 연결을 이용해 추락자를 손쉽게 끌어올리는 ‘Z-풀리(Pulley)’, 주머를 이용한 고정로프 오르기, 안전하게 하강하기 등도 모두 소화했다.

○ 극지의 국가대표들에게 응원을

차기 월동대의 실질적 살림꾼 역할을 맡은 총무 최성철 씨(36)는 신민철 월동대장, 지건화 박사(42·고층대기)와 함께 셋뿐인 극지연구소 직원이다. 나머지는 모두 외부에서 뽑은 인력이다. 그런 그조차도 남극에서의 월동에 대해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고 했다. 극한의 날씨와 고립된 환경도 두렵지만, 1년여 간 18명이 한결같이 단합해 생활할 수 있는 방안이 가장 큰 고민인 듯했다.

“제가 넓게 보지 못해 혹시나 소외되는 대원이 생기지 않을까란 걱정도 들어요. 제가 잘해야겠죠. 어쨌든 가장 큰 목표는 우리 대원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신 대장도 마찬가지. 그는 “3년 전부터 월동대장은 한국리더십센터에서 별도의 교육을 받고 있다. 대원들 간 화합은 화재와 같은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것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몇 번째 다시 남극을 찾는 사람, 몇 년이나 별러 월동대원을 지원한 사람, 미지의 땅에 발을 딛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가진 18명의 남자가 곧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다. 어느덧 세계 각국의 과학기술 격전지가 된 남극에서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다. 극지 강국으로의 발돋움을 준비하는 한국으로서는 어느 때보다도 그들을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용인=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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