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國弓 미스터리… 작지만 강한 ‘최종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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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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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활과 비교해보니…

영집궁시박물관
《 올림픽 양궁 경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활이 친숙해졌다. 그 중심엔 최근 영화 등을 통해 생겨난 국궁(國弓)에 대한 관심이 있다. 사실 활은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 민족에겐 수족(手足)같은 무기 였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 가 국궁의 미스터리를 들여다보고, 다른 나라 활과의 비교 실럼을 진행해 봤다. 》
#1
1274년 10월 19일,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 규슈의 하카다 만에 상륙했다. 일본은 규슈의 지방 행정 중심지인 다자이후(太宰府)를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쟁 수행 능력은 대륙의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몽골 및 고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사무라이 하나가 앞으로 나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OOO의 아들이며, △△△에서 공을 세웠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수십 발의 화살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일본군 본진을 향해서도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당시 몽골군을 비롯한 대륙 군대의 전술은 활의 집중사격에 이어 기병이 적진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활의 사거리 밖에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군은 당황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몽골과 고려군 각궁(동물의 뿔과 나무로 만든 복합궁)의 사거리는 185m 정도였던 것에 반해 나무로만 만든 일본의 활(단순궁)은 크기만 컸지 사거리가 80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활을 쏘다’, 김형국) 몽골과 고려가 사용했던 복합궁은 상대에게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대적한 자들을 모두 지옥으로 안내했다.

#2
1346년 8월 26일, 프랑스의 소도시 크레시 인근. 9000명(자료에 따라 최대 1만5000명)의 영국군은 3만5000명(〃 최대 10만 명,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3배 이상이었다는 것이 정설)의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프랑스군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미 해가 질 때라 공격을 다음 날로 미뤘던 프랑스 왕 필리프는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영국군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동생인 알렝숑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석궁부대가 피해를 보긴 했지만, 중장기병은 기세 좋게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크레시의 저녁 하늘에서 화살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살은 기사의 갑옷을 뚫었다. 언덕 위에 진을 친 7000명의 영국 궁수는 길이 180cm에 이르는 긴 활로 1분에 10번 이상 시위를 당겨댔다. 결국 프랑스군은 10차례 이상 진격했음에도 영국군 진영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영국 측 전사자는 기사 2명과 병사 300∼400명. 반면 프랑스 측에선 귀족 11명과 기사 1542명, 제노바 출신 석궁병 2300명, 보병 300∼400명이 죽었다. 수세기 동안 유럽 전장의 중심에 있던 중세 기사들은 크레시 전투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 동이족, 그리고 활

신무기의 등장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곤 했다. 변방의 민족이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르는가 하면, 번영하던 민족이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 변방으로 밀려난 경우도 많았다.

활은 원거리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는 데다 휴대가 간편한 장점을 지닌 강력한 무기다. 화약병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히 ‘최종병기’라 불릴 만큼 그 위력이 대단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겐 활과 관련한 얘깃거리가 많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우리를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큰 활을 쓰는 민족이란 의미인데 그만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당태종은 고구려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고, 몽골 장군 살리타도 처인성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 탄력 뛰어난 국궁, 일본 영국 몽골 활보다 훨씬 세다 ▼

시위를 당기면 활과 나는 하나가 된다. 손끝은 파르르 떨리지만 정신은 오로지 과녁을 향하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황학정의 장동열 접장이 시위르 당기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시위를 당기면 활과 나는 하나가 된다. 손끝은 파르르 떨리지만 정신은 오로지 과녁을 향하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황학정의 장동열 접장이 시위르 당기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 활인 국궁은 어떨까. 중국의 한 고서(古書)는 국궁을 가리켜 ‘크기는 작지만 사거리가 길고, 그 강도 또한 엄청나 경계해야 할 무기’라고 표현했다. 국궁의 위력은 영화에서처럼 한 명이 수십, 수백 명을 대적해 싸우게 할 정도였다.

고려 말 왜구가 강릉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강릉의 말단 병사 중 이옥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려 말 간신으로 악명이 높았던 이춘부의 아들이다. 이춘부가 살해되자 이옥은 병사로 강등돼 강릉으로 쫓겨났다. 그는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예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해 단신으로 말을 타고 해안의 왜구 진지로 달려가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통에 있는 화살(20발 남짓)을 다 쏜 이옥은 해안의 방풍림 속에 몸을 숨겼고, 분노한 왜구는 그를 쫓았다. 하지만 이옥은 전날 밤 숲 속 곳곳에 꽂아 놓은 수백 발의 화살을 뽑아 쫓아오는 왜구를 차례로 쓰러뜨렸다. 결국 왜구는 즐비한 사상자만 남긴 채 약탈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옥은 그 후 복권돼 이성계 휘하에서 고관으로 승진했다.(‘동아비즈니스리뷰’ 2010년 9월 1호, ‘전쟁과 경영’, 임용한)

문헌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신궁(神弓)으로 유명했고, 정조 역시 50발의 화살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정조는 49발을 명중시키면 마지막 화살은 일부러 허공이나 풀숲에 쐈다. 완벽한 경지에 이르면 자만에 빠지기 쉽다는 게 이유였다.

○ 3.3cm 뚫은 국궁, 300m 이상도 날릴 수 있어

국궁의 성능을 입증하는 무용담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국궁을 다른 나라를 대표하는 활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O₂’는 이를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실험 대상은 국궁과 일본의 죽궁(竹弓), 영국의 장궁(長弓·Longbow), 몽골의 각궁(角弓), 북미 인디언의 목궁(木弓) 등 5가지. 실험 장소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황학정(黃鶴亭)으로 잡았다. 황학정은 고종이 어명으로 경희궁에 세운 사정(射亭·활터에 있는 정자)이었지만 경희궁이 헐리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왔다.

시범은 황학정의 임성국 사범이 맡았다. 임 사범은 황학정 내 실내 연습장에서 압축스티로폼을 목표물로 언급된 5가지 활을 쐈다. 활과 목표물의 거리는 10m. 활은 길이와 재료, 장력(줄에 걸리는 힘의 크기) 등이 알려진 평균치에 가까운 것들을 사용했다. 화살의 경우 실제 사격에 쓰이는 것을 쓰되 화살촉은 안전을 고려해 하나같이 뭉툭하게 만들어 실험했다.

실험에 앞서 임 사범이 전제를 달았다. “사실 이렇게 쏘는 것만으로 어느 활이 더 우수하다고 단언하긴 힘듭니다.” 국궁을 제외한 다른 활의 경우 쏘는 자세 등에서 숙달되지 않은 데다 활마다 사용에 최적화된 조건이 있기에 한 가지 상황만 놓고 상세 비교를 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개략적인 특징 비교는 가능했다. 일단 가장 먼저 길이가 192cm에 이르는 영국의 장궁을 쐈다. 주목나무를 쪼개 만든 장궁은 5가지 활 가운데 시위를 당기는 데 가장 많은 힘이 필요했다. 화살은 육중한 느낌으로 날아가더니 목표물에 박혔다. 박힌 깊이는 약 3cm.

다음으론 길이가 220cm로 가장 긴 일본 죽궁을 쐈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화살은 꼬리 부분이 흔들거리는 모습까지 식별될 만큼 둔탁하게 날아가더니 목표물에 맞고 튕겨 나왔다.

세 번째는 양물푸레나무로 만든 북미 인디언의 목궁. 주로 인디언들이 짐승을 사냥하는 데 쓴 목궁의 길이는 국궁보다 짧은 110cm에 불과했다. 육안으로 본 위력은 일본 죽궁과 유사했다. 역시 화살이 목표물에 맞더니 튕겨 나왔다.

길이가 160cm인 몽골 각궁은 국궁과 생김새가 가장 비슷했다. 자작나무와 물소의 뿔, 쇠심줄 등으로 만든 몽골 각궁은 시위를 당기는 데 드는 힘이 영국 장궁 다음으로 많이 들었다. 화살은 힘 있게 날아가 목표물에 2.5cm가량 박혔다.

마지막으로 국궁을 쏘았다. 실험에 사용된 국궁은 길이가 131cm. 모양은 몽골 각궁과 비슷했지만 길이가 다소 짧았고, 두께 역시 그보다 얇았다. 시위를 당기자 활이 부러질 듯 크게 휘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목표물에 박혔다. 박힌 깊이는 3.3cm.

임 사범의 실내 시범이 끝난 직후 장동열 접장(국궁 수련생 중 우두머리)이 밖으로 나가 145m 전방 과녁을 조준해 국궁을 쐈다. 화살은 힘차게 날아가 과녁을 맞혔다. 장 접장은 “국궁의 적정 사거리는 145m 정도이지만 단련된 궁수가 쏠 경우 최대 300m 이상도 거뜬하다”고 설명했다.

○ 탄력성 극대화한 고급 병기

활은 크게 길이에 따라 1m 안팎의 단궁과 2m 안팎의 장궁으로 나뉜다. 단궁은 휴대가 쉽고 조작이 간편하다는 게 장점. 또 활을 쏠 때 힘이 많이 들지 않고, 말 위에서 쏘기 편하다는 특징도 있다. 장궁은 그런 요소들이 모두 단점으로 지적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이 우수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물론 장궁도 재료와 사용법에 따라 위력이 다르다. 같은 장궁임에도 영국 장궁은 일본 죽궁보다 사거리가 길고 강도가 세다.

그런데 길이가 120∼130cm 정도인 국궁은 단궁의 장점을 모두 지니면서 앞서 실험에서 보듯 관통력과 사거리 역시 뛰어나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황학정의 신동술 사두(射頭·사정을 관리하고 대표하는 우두머리)는 “활의 생명은 탄력성에 있는데 국궁은 모든 면에서 탄력성이 극대화된 고급 병기”라고 설명했다. 활은 재료에 따라 대나무 등 한 가지 재료로 만드는 단순궁과 다양한 재료를 쓰는 복합궁이 있다. 영국 장궁이나 일본 죽궁 등은 탄력이 낮은 한 가지 소재로 만든 단순궁. 그러다 보니 시위를 더 당기기 위해(화살을 더 멀리 날리기 위해) 활의 길이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국궁은 나무(뽕나무 또는 대나무)에 물소의 뿔을 붙이고, 스프링 역할을 하는 잘게 찢은 쇠심줄을 안팎에 둘러 탄력을 더한다.

국궁의 우수한 탄력은 곧은 활이 아닌 굽은 활, 즉 만궁(彎弓)이라는 특징으로도 설명된다. 만궁은 본래 굽은 활을 그 반대쪽으로 강하게 밀어 굽혀 시위를 거는 활을 말하는데 5중 굴곡형인 우리 활은 특히 그 휨 정도가 다른 활보다 월등하게 크다.

국궁 제조업체인 청주각궁을 운영하는 장인 김광덕 씨는 “국궁은 탄력이 뛰어나 장력을 운동에너지로 전환하는 효율성이 좋다”고 강조했다. 각궁은 활시위에 걸리는 장력이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는 비율이 80% 이상이라는 설명. 그는 “장궁의 에너지 전환 비율은 국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0∼40% 수준이고, 몽골의 각궁은 국궁과 유사하게 제작됐지만 덜 정교하게 만들어져 에너지 전환 비율이 50∼60% 정도”라고 덧붙였다.

○ 편전, 그 비밀을 밝히다

국궁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활과 조화를 이루는 화살이다. 화살은 그 길이와 굵기, 촉의 모양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국궁에 쓰이는 화살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이 편전(片箭)이다. 우리말로 아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은 길이가 24∼36cm에 불과한 짧은 화살. 그대로는 활에 걸쳐 쏠 수 없고,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통아(桶兒)라는 통에 넣고 쏘아야 한다.

편전은 최근 인기를 모은 영화 ‘최종병기 활’에도 등장했다. 영화에선 편전을 하찮게 여기던 청나라 오랑캐들이 주인공인 남이(박해일 분)가 날리는 편전의 위력을 맛본 뒤 두려움에 떠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편전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비밀 병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91년 만주족이 평안도에 침입했을 때의 상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군사가 처음에 장전(長箭)을 쏘았더니 저들이 뛰면서 피하기도 하고 그 화살을 주워서 도로 쏘기도 했다. 그래서 편전으로 쏘았더니 저들이 피할 수 없어 두려워했다.”

편전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사거리였다. 편전의 사거리는 당시 각궁으로 쏜 일반 화살의 사거리 150∼200m와 비교해 월등했다. 임진왜란 때는 편전이 420m 넘게 날아갔다는 기록까지 있다.

관통력도 우수했다. 보통 일반 화살이 초속 50∼60m 수준이었다면 편전은 70m를 훌쩍 넘긴다. 물체의 운동에너지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편전이 강판을 뚫을 만큼 관통력이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황학정 실내 연습장에서 편전을 쏴봤더니 그 결과가 놀라웠다. 편전은 목표물인 압축스티로폼을 5cm 이상 뚫었다.

편전이 무서웠던 이유는 또 있었다. 화살 장인 양태현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편전은 길이가 짧아 상대가 화살의 궤적을 보고 쳐 내기가 힘들었어요. 또 적들이 주워 재활용할 염려도 없었죠. 무엇보다 편전은 날려도 통아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상대는 활을 언제 쏘았는지도 알 수 없었죠. 전장에서 일종의 착시 효과까지 유발한 무기가 편전입니다.”

(도움말=유세현 영집궁시박물관 부관장·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조교)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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