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안지훈의 빈티지 특강]우키요에, 인상파-현대 만화에 영감을 주다

동아일보 입력 2011-09-24 03:00수정 2011-09-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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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오카 에이센(1864∼1905)의 구치에(卷頭畵·문학잡지나 소설책의 표지 다음에 등장하는 첫 그림) 작품 단풍잎 문양이 들어간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수줍은 모습이 아름답다. 그 옆에서 여인을 바라보는 노파의 모습과 구도는 적당한 긴장감을 준다. 새색시와 시어머니 또는 마이코(舞妓·견습 게이샤)와 그들을 관리하는 오카미상(女將さん)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안지훈 씨 제공
우키요에(浮世繪)란 이름은 아직 우리 귀에 낯설지만 우리 주변엔 의외로 많은 우키요에 작품이 있다. 내가 우키요에를 처음 본 것은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간 일식집에서였다. 오리지널은 아니었겠지만 일식집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런 그림들은 요즘에도 주변의 일본식 선술집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인생사를 그린 상업적 풍속화

우키요(浮世)는 덧없는 세상, 인생이란 뜻이다.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기쁨 이외에 슬픔과 걱정, 노여움도 가득한 세상이다. 우키요에는 이런 보통 세상(현세)의 풍속을 주제로 한 목판화를 이르는 말이다.

일본에서 목판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많은 사람이 불경에 나오는 장면을 새겨 책으로 찍어낸 것을 그 유래로 보고 있다. 오늘날의 우키요에와 비슷한 형태의 제작물들은 17세기부터 등장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우키요에는 일본이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와 경제적 안정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신흥세력인 무사와 상인, 일반 대중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주로 단색으로만 찍다가 18세기 들어 채색 판화가 보편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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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는 철학과 사상을 담은 ‘고상한’ 그림과는 출발과 목적이 분명하게 달랐다. 철저한 상업주의 정신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목판화인 덕에 당대 유명한 가부키 배우나 기생들의 모습을 수백, 수천 장의 그림으로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 없이 누구나 살 수 있었다. 책에 들어가는 삽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달력 그림이나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브로마이드’에 해당하는 작품도 많았다.

우키요에는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江戶)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예전에는 ‘에도의 그림’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중심지인 에도의 생활과 풍속을 많이 다뤘다.

○ 색 배열은 화가 아닌 인쇄 장인의 권한

성도 없이 ‘이케이’라고만 알려진 작가의 1870년대 작품 웃통을 반쯤 벗은 남자 5명이 꼬치구이용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 앉아있는 남자(오른쪽 위)는 주판을 두드리며 매상을 확인하는 중이다. 사뭇 진지하고 힘든 표정을 짓고 일하는 이들과 달리 밝은 표정을 하고 있다. 가게 매상이 제법 좋았나 보다. 이처럼 우키요에에선 당시 에도(도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우키요에 작품은 작가 한 명이 모두 제작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일종의 다색판화인 우키요에는 그림과 달리 서로 다른 역할의 여러 장인이 공동으로 만든다.

제작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프로젝트 매니저인 ‘한모토(版元·출판업자)’다. 한모토는 여러 장인을 모아 팀을 구성하며 작품의 성격과 제작 수량, 유통까지 방대한 영역을 책임졌다. 완성된 목판에는 한모토의 도장이 새겨졌다.

실제 제작에는 밑그림을 그리는 에시(繪師), 밑그림을 목판에 새기는 호리시(彫師), 다양한 색깔의 물감으로 판화를 찍어내는 스리시(摺師)가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그럼 우키요에 작가로 널리 알려진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1797∼1858)는 도대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일까. 이들은 모두 작품의 밑그림을 그린 에시였다. 에시의 역할은 호리시나 스리시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완성된 작품에는 에시의 도장이 찍혔으며 에시의 명성은 시장에서 작품의 인기를 좌우했다. 하지만 색의 선택이나 배열은 모두 스리시의 권한이어서 스리시의 실질적 기여도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스승 딸과 이혼하자 후계자 이름도 잃어

19세기 초에 제작된 스리모노(刷物·최고급 종이와 안료를 써 소량만 찍어낸 우키요에) 여주인으로 보이는 이와 그 뒤를 따르는 남자의 모습이다. 남자는 무엇인가 비단으로 싼 물건을 두 손으로 들고 있다. 비록 남자의 행색이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무라이만이 두 자루의 칼을 찰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낮은 신분의 일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스리모노는 상류층이 주로 즐겼던 것으로 그 가치와 희소성이 매우 높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키요에는 방 안에 앉아 차를 마시며 감상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서민층을 대상으로 하고 여러 가지 실용적 목적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당시 유행에 가장 민감한 그림이었다. 작가들도 주로 생계를 위해 작업을 했으므로 작품의 판매량과 시장 반응에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한모토는 대중에게 인기가 없는 작가들은 고용하지 않았다. 이런 작가들은 일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사라지거나 혹은 전업을 해야 했다.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

우키요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봤을 것이다. “2대, 3대 히로시게? 원래 히로시게와 다른 사람인가?” “왜 이렇게 같은 이름을 가진 작가가 많은 거지?”

우키요에는 철저하게 도제 방식으로 전수됐다. 그만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중요했다. 당시의 다른 예술 분야처럼 우키요에 작가들도 스승에게 이름을 받거나 후계자가 되어 스승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스승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영광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스승의 명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 스승이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면 그 부담이 더했다.

2대와 3대 히로시게는 괜찮은 작가이긴 했지만 스승의 명성과 재능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안타깝지만 두 사람 모두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들은 독특한 인연으로도 유명했다. 2대 히로시게는 뛰어난 실력 덕분에 1845년 스승(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아들이 죽자 그의 양자가 됐다. 1858년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딸(오타쓰)과 결혼하고 유언에 따라 2대 히로시게가 됐다.

하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865년 이혼한 후 이름을 바꾸고 요코하마로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더는 얻지 못하고 수출용 등(燈)이나 차를 담는 상자에 그림을 그리면서 근근이 살아가다 1869년 굶주려 죽었다고 한다.

한편 2대 히로시게와 이혼한 오타쓰는 아버지의 또 다른 제자와 재혼하는데 그가 바로 3대 히로시게다. 참으로 복잡한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 성인 애니메이션 뿌리도 보여

쓰지오카야 분스케(1814∼1895)의 에도 명소 시리즈 중 하나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것은 서양식 원근법을 차용한 표현 방식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우키요에 작품들과 확연하게 다른 구도와 표현 방식을 느낄 수 있다.
우키요에는 주로 다양한 사회상의 묘사나 인기 가부키 배우의 모습, 일본의 국내 명소를 소개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런 것 이외에도 다양한 쓰임새가 있었다.

첫째, 책의 삽화다. 사진이 보급되기 전 근대 일본에서는 사진 대신 우키요에를 썼다. 이런 삽화는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쉽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우키요에 작가들은 오늘날로 치면 일러스트레이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정치적인 목적이나 선전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도 전쟁터나 군인들을 다룬 우키요에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그림들은 19세기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1904∼1905년)의 승리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메이지 시대의 장군들이 큰 세계지도를 펴둔 채 비밀스러운 회의를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들도 있다. 물론 제국주의와 아시아 정복의 야욕을 국민에게 교육하려는 게 그림의 의도였다.

한편 우리의 민화처럼 우키요에에도 가(春畵)라 불리는 ‘성인물’이 있었다. 가는 ‘잠자리 머리맡에서 보는 그림’이란 의미에서 마쿠라에(枕繪)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본의 춘화는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표현을 담은 것이 많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성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우키요에에서 보이기도 한다.

○ 고흐가 따라 그리기도


1814년 우키요에 대가 중 한 명인 호쿠사이는 15권으로 구성된 ‘망가(漫畵)’를 출판했는데, 검정과 회색 톤의 컬러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주제는 풍경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방대했다.

현대만화와 ‘호쿠사이 만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조심스럽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만화의 출발을 여기서 찾는 이들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상당수다. 일본 만화의 출발을 12세기 헤이안 시대의 두루마리 그림이나 낙서에서 찾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19세기 우키요에 작품의 특징은 오늘날 ‘만화 왕국’ 일본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 화가들, 특히 인상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강렬한 색감과 파격적인 구도가 대표적인 요소다. 고흐와 모네의 작품에는 우키요에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고흐는 히로시게의 ‘아타케 다리에 내리는 소나기’를 다시 그리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서양의 안료가 수입되면서 다양한 색깔이 쓰이기 시작했고, 서양식 원근법이 사용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하지만 우키요에는 결국 서양에서 들어온 발달된 인쇄 기술과 사진 등 새로운 매체의 유입으로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안지훈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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