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10>우리에게 너무나 유익한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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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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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권력욕이란···
생선을 탐내는 고양이의 본능 같은 것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일본의 근대문화와 그들의 말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우리 문화와 우리말은 무엇인가 세련되지 못한 낡은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조선시대에도 애써 발명한 한글이 아녀자의 언어, 즉 비공식적인 언어로 격하되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일제강점기는 말해 무엇 할까.

광복을 맞아 미국은 주도적인 문화의 상징으로 대두되었다.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던 창씨개명을 비판하던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바꾸고 있을 정도다. ‘우리말보다는 영어 숙련이 성공의 비밀’이라는 무의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경제적 필요성을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대학마저 이미 미국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점령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미국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하지만 반드시 감당해야만 하는 두 가지 제도를 들여놓고 있다. 하나는 아직 실험 단계에 있는 배심원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시행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한 청문회제도다. 아름다운 칼을 조심할 일이다. 아름다움에 취해 함부로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가는 손을 베이기 십상이니까. 아름다운 칼이지만 그것에 손을 베인, 혹은 베이게 될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첫 번째 칼인 배심원제도는 시대의 법에 대한 기존의 권위주의적 구조나 생각을 붕괴시켜버릴 것이다. 이제 변호사들은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으로 배정된 평범한 이웃들을 설득해야 한다. 당연히 평범한 이웃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말과,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수사학이 없다면 그 누구도 재판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헌법 몇 조, 형법 몇 조를 앵무새처럼 떠들었다가는 배심원들을 설득하기는커녕 위화감만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법, 그리고 법 감정이 민주화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또 한 자루의 아름다운 칼로 지금도 누군가를 베고 있는 칼이 바로 청문회제도다. 아마 정치가들은 이 칼로 상대 당파의 사람들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제도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서로 칼을 마구 휘두르는 과정에서 진정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우리 일반 사람들이다. 덕, 명성, 부, 지식, 능력 등이 있다고 알려진 지도층 사람들의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문회에서 벌어지는 구차한 변명과 궤변에 짜증을 내지 말고 즐길 일이다.

그래서 청문회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전당이기도 하니 유용하기까지 한 제도다. ‘출세와 부’라는 사사로운 욕망만을 좇았던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왜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지,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시인의 마음이 중요한지 설명할 것도 답을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을 청문회가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문회라는 칼로 서로를 베면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 후보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순진할 뿐만 아니라 멍청해 보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의 차가운 교훈마저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의 자격 없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아마추어와 같은 사람들이다.
‘군주는 선한 품성을 실제 구비할 필요는 없지만, 구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심지어 나는 군주가 그런 성품을 갖추고 늘 가꾸는 것은 해로운 반면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용하다고까지 감히 장담하겠다.’

―‘군주론(II Principe)’
근대 정치학은 정치와 윤리를 분리시키면서 출현한다. 정확히 말해 윤리가 정치의 수단이나 도구가 되면서 근대 정치학은 시작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근대 이전의 정치에서 정치가 윤리의 수단으로 사유되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사건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학의 시조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윤리라는 외양만을 갖추어야지, 실제로 윤리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 그는 군주, 즉 독재자가 윤리적인 인격이라고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도 그가 ‘국가의 압제 속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던’ 공화주의자였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저 ‘군주론’이 군주에 대한 청문회로 읽힐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자신은 정말 물고기를 싫어한다는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기는 사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욕의 화신이지만 윤리적인 인격자라는 제스처를 취할 줄 모르는 순진한 우리 정치가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일이다. 탐욕스러운 정치가가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권력을 잡았을 때 발생할 비극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이라면 불행이랄까. 누군가에게 우리의 물고기를 맡겨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권력을 좋아하지 않는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선천적인 권력욕을 벗어던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물고기를 싫어하는 고양이를 찾는 일만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권력욕은 해묵은 소유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욕망이다. 사적 소유를 토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사사로운 소유의 욕망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소유욕은 내면에서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데다 외부 세계도 이를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사로운 소유욕이 공적인 소유보다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나 있을까? 자기 것을 지키는 데 연연하는 우리를 조롱하는 장자(莊子)의 말을 들어보자.

‘배를 계곡 속에 감추어두고 통발을 못 속에 감추어두면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지만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도망갈 수도 있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작은 것을 큰 것 안에 숨겨두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언제나 그것은 없어질 수 있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학력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지 소유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귀담아들을 말이다. 자신이 배운 것, 자신이 벌어들인 돈, 자신이 힘들여 획득한 권력을 아무도 갖지 못하도록 홀로 소유하려고 한다면, 누군가 그것을 훔쳐갈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런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것을 훔칠 수 있다는 말인가?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두는’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어디서나 편안하다. 그에게 있어 학력도, 돈도, 권력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타인들도 그에게 기꺼이 자기의 물고기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초탈했던 장자만의 생각이라고 가볍게 넘기지는 말자. 현실참여적이었던 맹자(孟子)도 말하지 않았던가. “천하라는 넓은 집에서 머물고, 천하라는 올바른 위치에 서며, 천하라는 커다란 도를 행해야 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거천하지광거 입천하지정위 행천하지대도)”고 말이다.

맹자는 바로 이런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고 불렀다. 반대로 졸장부(拙丈夫) 혹은 소장부(小丈夫)는 천하를 천하에 감추려고 하지 않고, 천하를 자기 수중에 넣으려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학력, 돈, 그리고 지위로 어깨를 으쓱거리기는 하지만 그들은 타인을 한 번이라도 이웃이라고 생각지 않고 경쟁과 극복의 상대로만 여기고 살아왔으며, 어떤 대가도 없이 아낌없이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멍청한 짓이라고 치부했던 사람이다. 아무리 능청스러운 연기를 수행하려고 해도 물고기를 보면 침을 꿀꺽 삼키는 고양이에 비유할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겉보기에는 대장부였던 대부분의 사람이 졸장부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청문회는 매우 중요하다. 자신과 같은 졸장부가 대장부 노릇을 하려 했다고 짜증내거나 절망해서는 안 된다. 지금 대장부가 없다면, 우리는 대장부를 길러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처절하게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지, 혹은 언젠가 도래해야만 할 대장부의 싹을 도려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강신주 철학박사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

종교와 윤리가 정치와 혼재되었던 중세 시대까지의 정치철학을 극복하고 윤리와 종교를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던 근대 정치철학의 창시자. 군주를 위한 냉혹한 정치철학을 피력했던 국가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군주의 모든 비밀을 폭로했을 때, 이로움을 얻는 것은 백성들이지 군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군주론(II Principe)’과 함께 양대 주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로마사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서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임을 피력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대장부(大丈夫) 혹은 대인(大人)☆☆::

맹자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버리고 전체 공동체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형을 말한다. 중국의 전설적인 폭군 걸(桀)임금과 주(紂)임금을 그들의 신하들이 축출한 것이 정당한 일이냐는 질문에 맹자는 ‘걸임금과 주임금은 대장부 혹은 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축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는 맹자의 논의는 후에 새로운 왕조 창업의 정당성 논리로 사용된다. 흔히 맹목적인 충성을 강조할 것 같았던 유학 사상에 이처럼 혁명적인 요소도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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