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가면 뒤 흔들리는 영혼, 그대 이름은 남자

  • 동아일보

요시 베르그&오데드 그라프 서울세계무용축제 참가작
연출 ★★★★ 안무 ★★★☆

9일 무대에 오른 이스라엘 안무가 요시 베르그와 오데드 그라프의 공동안무작 ‘네 남자, 앨리스,바흐, 그리고 사슴’. 사진 제공 서울세계무용축제
9일 무대에 오른 이스라엘 안무가 요시 베르그와 오데드 그라프의 공동안무작 ‘네 남자, 앨리스,바흐, 그리고 사슴’. 사진 제공 서울세계무용축제
막이 오르면 커다란 뿔을 자랑하는 수사슴 인형이 무대 한쪽에 앉아 있다. 슈퍼히어로를 연상시키는 마스크를 쓴 남자 네 명이 등장한다. 액션영화 속 ‘합을 맞춘’ 무술 장면을 연상시키는 동작들이 이어지다가 별안간 무용수 한 명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아주 먼 어느 곳, 네 명의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에는 커다란 평면 스크린, 그리고 맥주와 고기가 가득한 냉장고가 있었습니다….”

9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는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참가작의 하나로 이스라엘 현대무용가 요시 베르그와 오데드 그라프의 작품 ‘어느 더운 나라의 정비공 트리오’와 ‘네 남자, 앨리스, 바흐 그리고 사슴’이 무대에 올랐다.

‘네 남자…’에 등장하는, 동화(童話) 아닌 동화에서 부족한 건 여자뿐이다. 남자다운 남자, 진짜 남자, 마스크를 쓴 슈퍼히어로의 세계는 길을 잃고 헤매던 아름다운 여인 앨리스가 나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남자들은 앨리스를 집에서 하룻밤 쉬고 가라고 설득한다.

앨리스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후, 남자들은 혼란에 빠진 채 번쩍거리는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춘다. 한 남자는 수사슴의 목을 잘라 사라진 뒤 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등장해 다른 무용수를 모두 처치해 버리고 홀로 무대에 남는다.

‘네 남자…’는 마스크와 수사슴 인형 같은 소품이나 별안간 등장하는 동화처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직조했다. 유기적으로 전개되는 안무 역시 가슴을 두드리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등 이른바 ‘남자다운 제스처’들과 뒤섞이며 적절한 유머와 내러티브가 담긴 극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안무가들은 “현대사회에서 ‘남자 되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에서 말하는 현대사회의 남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마스크 쓴 슈퍼히어로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들의 기존 작품에서 본 듯한 장면이 일부 등장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막이 오른 뒤 관객들이 초조해질 정도로 오랫동안 음악만 틀어둔 점, 남자들이 나란히 서서 앞뒤로 오가는 반복 동작, 작품 초반의 음악이 특히 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들을 제외하면 이 공연은 현대무용 강국으로 불리는 이스라엘 신예 안무가들의 연출력과 상상력을 감상할 기회로 부족함이 없는 무대였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I: 제13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2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호암아트홀, 세종M씨어터, 서강대 메리홀, 서울시내 일대. 02-3216-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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