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북]여행작가들의 스승이자 경쟁자 김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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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1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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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최초의 여행가이자 최고의 모험가
● 정신적 고향인 인천 영종도에 세워질 '김찬삼 세계문화 여행원'

"고교시절 청계천 중고서점에서 여행가 김찬삼 선생님의 책을 만나면서 세계여행가를 꿈꾸게 되었습니다."(여행작가 이태훈)

"30여 년 간 세 번의 세계 일주로 160여 개국 구석구석을 탐험했던 원조세계 여행가 김찬삼 선생의 여행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던 책입니다.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으면서 나 역시 세계를 누비는 꿈을 꾸었답니다."(탐험가 박영석 대장)

바야흐로 해외여행의 계절. 서점가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혹은 아직도 여행 중인 젊은 작가들의 여행기로 가득하다. 티베트와 히말라야 같은 오지에서부터, 유럽과 남미 등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한층 가까워진 아프리카의 속살까지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는 1990년대 배낭여행의 붐과 함께 해외로 물밀듯이 밀려나간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이뤄진, 보다 내밀한 세계화의 성과이다. 최근 경향은 전업 작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장기휴가를 내고 아프리카나 남미대륙을 횡단하며 자신의 경험을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연재하는 것이다. 그 저작들이 다시 책으로 완성돼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여행 작가들의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반드시 마주치는 인물이 있다. 2003년 고인이 된 김찬삼 선생이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여행가가 있었던가?"라는 질문에 국내 여행가들이 주저 없이 정답으로 제시하는 사람이다.

▶ 한비야 박영석 등 거의 모든 여행가에게 영감을 준 스승

김찬삼(1926~2003)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여행가로 통한다. 1926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판사인 아버지를 따라 젊은 시절 인천에서 성장했다.

"자식에게 여행을 시키라"는 선친의 교육 철학을 받아들인 그는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그의 조국 대한민국은 식민시대와 6·25의 동란을 거친 절망과 암흑의 나라였다.

북으론 휴전선이 가로막고 안으론 가난함으로 인해 해외여행이 언감생심일 당시 그는 파격적으로 밖을 내다봤다. 그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아프리카보다 더 낮은 시대"에 지리학을 공부하고 세계일주를 꿈꾼 것이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2년 10개월 동안 그는 1차 세계여행을 감행하여 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을 걷고 달렸다. 그 코스를 거리로 환산하면 지구 세 바퀴 반가량이다. 이 경험을 토대로 첫 여행서를 낸 그는 "내가 본 것을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으로 세종대와 경희대 강단에 섰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대학에 재직하면서 지속적으로 세계일주를 감행, 평생 모두 세 차례 세계를 일주하고, 20여회에 걸쳐 테마 여행을 했다. 순수 여행기간만 14년에 해당하고 거리로는 지구를 32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이거나 호사스러운 여행이 아니었다. 매번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유서를 쓰고 다닐 정도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선생은 "아프리카 여행은 공포와 기아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갖은 사경에 부딪친 것도 모두가 나의 여행을 더욱 보람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배고픔으로 허덕일 때는 40일 동안 굶고도 살았다고 한다. 아마존에선 쥐를 잡아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고, 빗물을 마시고 이질에 걸려 혼쭐나기도 했다.

그는 여행기에서 "어쨌든 '희망 있는 굶주림'이니 그토록 괴로운 지경은 아니다"며 "나는 음식이 있으면 많이 먹어두고, 없으면 며칠 동안 굶어도 되는 '아코디언식 위장'을 가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점은 자신의 여행을 단순한 여행으로 끝내지 않고 여행기를 작성했다는데 있다. 그렇게 출간된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1960~70년대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기록한 고전이자 한국인의 눈을 세계로 트이게 만든 교과서로 자리매김한다.

▶ 시대를 앞서간 한국의 대표 여행가

그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사람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500달러 시절 그는 요즘 여행가들도 모방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고 때론 구도자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첫째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KOREA'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 그는 여행 와중에 민간외교관 역할도 수행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애국가'와 '아리랑'을 전파시켰다. 선생은 후배 여행가들에게 틈만 나면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민요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만하며, 아리랑의 삼박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나 흥겹게 하는 국제성을 지녔다"고 자랑하곤 했다.

둘째,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철저하게 기록을 남겼다. 젊은 시절 그는 마르코 폴로를 모방해 "서방견문록'을 쓰겠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이를 실천한 그는 스스로 "지도와 카메라만 있다면 세상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다"고 자부할 정도로 기록하고 또 기록해 자신의 여행기를 온전하게 책으로 남겼다. 따지고 보면 그가 160여개국을 탐험했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남겼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셋째, 여행을 발전 기회로 승화시켰다. 1964년 11월말 그는 2차 세계여행 도중 아프리카 가봉 람바르네를 찾아가 20세기의 성인인 슈바이처 박사를 직접 만나게 된다. 어린시절 그는 슈바이처의 이야기를 듣고 줄곧 아프리카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 자신 앞에 다가온 슈바이처를 목격하고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당시 선생은 슈바이처 박사에게서 두 가지 선물을 받았는데, 카키색 바지가 그 하나이고 좌우명이 나머지 하나였다. "우물은 한 우물만, 물이 나올 때까지!"라는 슈바이처의 교훈은 고스란히 선생의 좌우명이 됐고 그는 이를 평생 실천해 냈다.

'여행에서 낳고(태어나고), 여행에서 살다가 여행으로 죽겠다'는 그의 결심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래지 않았다. 1992년 67세의 노장 여행가는 다시 배낭을 메고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 인도 중동 동유럽을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7만3000㎞의 서방견문여행을 감행한다.

장장 314일의 여행기간 도중 인도에서 열차사고로 머리를 다친다. 몇 달 뒤 터키에서도 머리에 부상을 입은 그는 이후 언어 장애에 시달렸고, 뇌출혈 후유증으로 2003년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 김찬삼이 남긴 것… 직업으로서의 여행

여행 가이드 북이란 이제는 너무 흔하다. 웬만한 가이드북으로는 눈높이가 껑충 올라간 해외 여행객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시절이 됐다. 때문에 적잖은 '제2의 김찬삼'들은 선배의 정신과 실천을 이어 받아 오늘도 고단한 여행가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김찬삼 선생을 따라 여행 칼럼니스트가 됐다는 이태훈은 "대학시절 아르바이트와 여행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며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세계여행을 떠났고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태국과 동남아에 대한 베스트셀러 여행서를 작성한 안진헌은 "우리 세대는 여행이 곧 삶이자 목표였다"며 "선배 여행가들의 모험가적인 도전이 우리 같은 배낭여행족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김찬삼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직업인으로서의 여행가'에 대한 비전이라고 여행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는 여행을 멈추면 종종 강단에 서고 저술활동에 몰두 했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다음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은 충분한 가치가 있고, 직업으로 삼아도 좋을만큼의 일생일대의 모험임을 온 몸으로 증명해보였다.

김찬삼의 책은 1990년대 이후 헌 책방에서도 종적을 감췄다. 론리플래닛 등 세계적인 여행가이드북이 범람하고, 한비야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 여행 작가들이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최신 정보를 담은 책을 발간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선생의 여행가 정신은 수많은 후배 여행가들의 존경과 찬탄의 대상으로 남았다. 수많은 제2의 김찬삼을 키워내는 젖줄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과학자들, 역사학자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사업가들, 산악인들, 그리고 축구와 피겨, 골프를 잘하는 운동선수들은 김찬삼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을 겁니다. 자신에게 미래를 탐험할 용기와 꿈을 준 빚 말입니다."(역사학자, 뗏목 탐험가 윤명철 박사--제1회 김찬삼 여행상 수상자)

"김찬삼은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수업에서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다큐멘터리 감독, 여행 작가 박준)
[인터뷰] "그는 한국 최초의 여행가이자 세계인"
-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 저자 김재민

인천 송도고등학교 지리교사인 김재민 씨(50)는 1979년 대학에서 김찬삼 선생으로부터 세계지리를 배운 1세대 제자그룹에 속한다. 당시 여느 지리학과 지망생과 마찬가지로 '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를 읽고 지리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3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지리교사이자 다수의 배낭여행서를 쓴 여행작가로 활약 중이다. 지금은 그는 '김찬삼 기념사업회' 일을 도우며 최근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위인전 김찬삼'을 발간하기도 했다.

- 대학에서 김찬삼 선생으로부터 사사했다고 들었다.

"1979년 경희대에서 세계지리를 강의하실 당시 나는 신입생이었다. 세계 여행의 꿈을 위해 지리학과에 가게 됐는데 선생을 강단에서 만났으니…. 그분의 생생한 강의에 굉장히 흥분하기도 했다."

- 스승에 대한 책을 쓰셨는데….

"그는 위대한 분이다. 우리나라 여행문화의 발전뿐만 아니라, 전쟁 직후 해외에 무관심한 국민들에게 세계를 온전하게 소개한 인물이다. 어찌 보면 세계화의 물꼬를 튼 '세계화의 선구자'로 불러야 한다. 대한민국의 여행가와 탐험가 여행 작가는 모두 김찬삼 선생의 유산인 셈이다."

- 김찬삼 선생의 책이 지금도 유효할까?

"실용적인 의미는 다 사라졌다. 이제는 더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는 TV나 신간 서적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본다. 1960년대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 흔적이자, 당시의 풍광과 인문지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아마도 영원한 대한민국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 김찬삼의 세계여행 기념관이 개관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예전에는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최근엔 명성이 퇴색한 면이 있다. 가족과 후배들이 안타까워하다가 2003년 '김찬삼 기념사업회'가 만들어 졌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인천 영종도에 여행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현재 인천시와 양해각서(MOU)가 체결된 상태인데, 곧 개관해 세계여행에 대한 인식 제고를 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여행가 김찬삼에 대한 자료는 '김찬삼 세계문화 여행원'(http://www.tourtown.net)에 많이 올라와 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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