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이승의 恨을 吐하고 죽어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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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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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김진규 지음/340쪽·1만1000원·문학동네

‘지관의 몸이 사방으로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흘째 빈속이었고, 한데서 흠뻑 젖었으며, 몸부림도 과한 터였다. 게다가 몸을 거스르기까지. 다 연식에 맞지 않았다.’ 이 글맵시에 지레 겁먹지 말 것. 김진규 씨(41)의 새 장편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은 너울너울한 문체로 치장했으되, 작가 자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속된 이야기’다. 조선조를 배경으로 저승이라는 환상세계를 끌어들여 상상력을 넓힌 데다, 인물 간 관계를 치밀하게 교직해서 막판에 퍼즐처럼 맞춰지는 재미를 준다.

조선 영조 시절, 그칠 줄 모르는 비로 인해 전염병이 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넋을 걷어오느라 저승차사들이 바쁘다. 자격훈련도 수료하지 못한 수습 차사들까지 동원된다. 그중 하나가 화율. 많은 저승차사가 그렇듯 화율도 맺힌 사연이 있다. 동성애자라는 게 들켜서 겸사복(조선시대 임금의 신변 보호를 맡은 친위병) 동료들에게 맞아 죽었다. 함께 죽은 연인 설징신을 저승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나 늘 전전긍긍해하는 화율이다. 그러잖아도 넋걷이가 서툰데 마음 한쪽이 다른 데 있으니 실수가 예정된 터다. 저승 명부에는 이름이 없었던 소녀 연홍과 부딪쳐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화율은 넋걷이의 의무를 제쳐두고 연홍의 뒤를 따라다닌다.

화율과 설징신의 인연, 연홍과 약혼자 수강의 인연, 수강의 스승인 염색장 채관과 아내의 인연이 얽혀 있지만 복잡하지는 않다. 작가는 채관의 사연에다 ‘밝혀져야 할 비밀’을 배치함으로써, 결말을 궁금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이 과정에서 폭력과 유린, 동성애 같은 대중적인 코드도 섞여든다. 그렇다고 그저 휙휙 넘어가지만은 않는 책이다. 이 작품은 사람이 상처와 어떻게 화해하는가를 절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장편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에서 예스러운 문체 속에 짜임새 있는 이야기 솜씨를 펼쳐 보인 작가 김진규 씨. 사진 제공 사진작가 박재홍 씨
장편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에서 예스러운 문체 속에 짜임새 있는 이야기 솜씨를 펼쳐 보인 작가 김진규 씨. 사진 제공 사진작가 박재홍 씨
정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연홍은 약혼자를 찾아가는 길에 눈이 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연히 마주친 사내에게 겁탈마저 당한다. 고문으로 혀가 잘린 수강은 강간당하고 임신한 몸으로 자신을 찾아온 연홍을 맞아야 한다. 두 남녀의 상처를 품어주는 채관에게는 전생에 백제의 사반왕으로 살았던 기억이 있다. 사반왕이었을 때 그는 아이마저 버릴 만큼 마음을 주지 않았던 아내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다. 이들 곁을 맴도는 저승차사 화율에게는 연인 설징신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한이 있다.

작가는 이 인물들이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게 하고, 눈물이 마르도록 울게 한다. 그런 뒤에 오는 침묵과 마주하면서 상처 입은 자신을 인정하게 한다. 작가는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놓은 옛 사람들의 관습에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베끼면서 살지 말라”(채관의 말)고 인물들에게,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화율과 연홍, 수강, 채관의 얽힌 관계가 하나하나 풀리는 과정에 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별감을 사랑한 여인, 화율을 상제에게로 데려다주는 사공 등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물들도 결말에 이르러 주요 인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가의 꼼꼼한 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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