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信義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거늘 공자는 ‘논어’ ‘衛靈公(위령공)’의 이 章에서 군자는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어째서인가? 군자는 올바른 도리에 대해서는 굳게 지켜 흔들림이 없어야 하지만 是非曲直(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그저 처음 뜻을 관철하려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貞은 바르고도 굳다는 말로, 節操(절조)가 굳음을 가리킨다. 諒은 작은 믿음, 융통성 없는 고집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諒은 아량이 좁고 판단을 잘못하여 일시적인 서러움이나 격렬한 감정 때문에 작은 의리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尾生抱橋(미생포교) 즉 尾生之信의 고사는 그 예다.
諒은 貞과 달리 義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諒의 자세를 지닌다면 선비로서 아랫길은 갈 수 있지 않을까? ‘子路(자로)’에서 공자는 선비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첫째 부끄러움을 알아 자신을 단속하고 외국에 나가 사신의 重任을 수행하는 선비, 둘째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 일컫고 한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 일컫는 선비에 이어, 말에 신의 있고 행동에 과단성 있는 소인을 셋째 부류라고 인정했다. 곧 “言必信(언필신)하며 行必果(행필과)가 갱갱然小人哉(갱갱연소인재)나 抑亦可以爲次矣(억역가이위차의)니라”고 했다. 말이 반드시 신의를 지키고 행동이 반드시 과단성을 지님은 돌이 서로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내는 소인이라 하겠는데, 그나마 선비의 맨 아래 부류일 수는 있다고 한 것이다.
君子는 흔히 黃河의 중류에 있는 砥柱石(지주석)처럼 시대의 혼탁한 흐름에도 휩쓸려 가지 않고 毅然(의연)한 인물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작은 信義를 지켜 융통성 없는 사람은 小人일 따름이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인간적인 미덕을 지닌 사람이다. 信義마저 없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무어라고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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