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화가 신사임당, 18세기부터 ‘율곡의 어머니’로”

  • 입력 2009년 6월 10일 02시 51분


이숙인 교수 이미지 변화 분석

5만 원권 화폐에 초상이 들어가는 신사임당(1504∼1551)은 생전에 뛰어난 그림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산수(山水), 풀, 벌레 등을 잘 그린 그를 동시대 지식인들은 화가로 불렀다. 그러다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사임당을 부르는 호칭은 ‘신부인’으로, ‘율곡의 어머니’로 차츰 변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신사임당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그 자신’에서 ‘부인’으로, ‘어머니’로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받은 셈”이라고 해석했다. 이 교수는 계간 ‘철학과 현실’ 여름호에 기고한 글 ‘그런 신사임당은 없었다: 권력과 젠더의 변주’에서 사임당에 대한 담론 변화와 그에 따른 호칭 변화를 살폈다.

사임당과 동시대 시인인 소세양은 1548년 사임당의 산수화에 시를 지어 넣으면서 ‘동양신씨의 그림 족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 문장가 정유길 등도 비슷한 시기에 사임당의 산수도를 보고 감상을 시로 읊었고 정유길은 사임당의 포도그림을 ‘신령이 응축되어 오묘한 조화를 빚어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16세기 지식인들에게 사임당은 ‘어머니’나 ‘부인’이 아니라 ‘화가 신씨’였다”고 설명했다.

사후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사임당은 ‘부덕(婦德)의 신부인(申夫人)’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송시열이 주도한 담론에서 사임당은 여성성과 모성성을 함께 지닌 인물로 그려졌다. 송시열은 1659년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에서 사임당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 뒤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썼다. 이 교수는 “송시열에게 사임당의 그림은 율곡 이이의 존재를 더욱 특별하게 해주는 보조물이다”고 해석했다.

송시열 이후로 화가보다 율곡의 어머니로서 사임당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김진규가 1709년에 쓴 ‘사임당 초충도(草蟲圖) 발문’은 “율곡 선생 어머니가 그린 풀벌레 일곱 폭이다”로 시작한다.

그는 이어 그림을 호평한 뒤 “내가 들으니 부인은 시에도 밝고 예법에도 익어 율곡 선생의 어진 덕도 실상은 그 어머니의 태교로 된 것이다”고 썼다.

송상기는 1713년 ‘사임당화첩발’에서 “선생(율곡)은 백세의 사표인 만큼 세상이 어찌 그분을 앙모하면서 그 스승의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인이 뒷세상에 전해진 까닭은 본래 이유가 있지만, 그 위에 이 그림첩이 있어 그것을 도운 것이다”고 기록했다.

이 교수는 “송상기에 의하면 사임당의 정체성은 화가보다는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어머니에 있다”면서 “즉 사임당은 율곡으로 인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으로, ‘율곡이 없으면 사임당도 없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18세기 이후부터 ‘율곡의 어머니’에 방점이 두어지면서 사임당의 ‘어머니’ 신화가 생산됐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