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5>

  • 입력 2009년 6월 1일 13시 29분


이런 확인은 어색하다. 내가 당신 마음을, 당신이 내 마음을 가졌던 게 맞지요? 라고 묻는다고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차라리 묻지 말고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쥐어볼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웃는다면? ……확인에도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

민선이 앨리스를 외면한 채 핏발 선 눈을 비비며 석범에게 다가섰다. 어젯밤도 글라슈트를 점검하느라 팀원 모두 밤을 새운 듯했다.

"잠시만 얘기해요."

어제 새벽 달섬을 나오며 키스한 후 딱 하루 만이다.

꽃뇌와 박말동을 비교하는 동안, 석범은 사이사이 노, 민, 선 이름 석 자를 떠올렸다. 계속 연락을 했지만 글라슈트 다른 팀원들처럼 불통이었다. 나이트메어 치유와 달섬으로의 질주, 그리고 부서진 보트와 열정적인 키스 모두 꿈만 같았다.

긴 복도를 꺾자마자 민선이 갑자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턱을 올려 입술을 찾았다, 꿈이 아님을 단번에 가르쳐주려는 듯이. 석범은 뜻밖의 입맞춤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밀었다.

"민, 민선 씨!"

민선은 밀려나지 않고 더 강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진행요원들이 곁을 지나갔지만 민선은 오로지 그의 입술에만 집중했다. 세상 모두 잠들고 달섬에 단 둘만 깨어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어젯밤엔 어디로 숨었던 겁니까?"

"우리…… 방금 또 입을 맞췄어요. 맞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석범은 민선의 엉뚱한 물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최 볼테르 교수를 용의자 혹은 살해당할 피해자로 보고 탐문하듯, 나하고도 딱딱하게 갈 건가요? 그럼 나도 공식적으로 침묵하고 이만 돌아갈래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겁니까' 말고 '거야!' 연인끼린 반말, 상식인데……. 그래야 나도……"

민선이 말끝을 흐렸다.

연인끼린 반말!

석범이 마음으로 되뇌었다. 적어도 달섬에서 나눈 키스가 분위기에 휩쓸린 한 순간의 실수는 아닌 것이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또박또박 물었다.

"어젠 대체, 어디 있었어?"

"좋네 훨씬. 헌데 어쩌나, 비밀! 오늘 이기면 또 거기로 숨어야하니까. 애써 찾지는 말아요."

"위험해."

"설마 최 교수가 살인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님 살인마가 최 교수를 죽이려고 우리 비밀 연구소를 덮칠까 염려하는 건가? 걱정 말아요. 우린 안전해. 지난밤도 아무 일 없었고."

"경기를 마친 후 최 교수를 꼭 만나야겠어. 부탁해."

"자문위원에게 하는 공식적인 부탁인가요? 아님……?"

"노민선 박사가 아니라 민선 씨에게 부탁하는 거야."

민선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럼 생각해볼게요. 하나 큰 기대는 말아요. 최 교수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전처럼 화를 내진 않지만 아쉬운 부분 체크하고 보완 계획 세우느라 바쁘답니다."

민선이 슬쩍 그의 손을 쥐었다가 놓은 후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합 중이라도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그녀가 빙글 돌아서며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이렇게 신호를 보내란 얘기? 오케이."

석범은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얼얼한 입술을 손등으로 비볐다. 민선의 향기가 입술에서 손등으로 옮겨왔다.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다.

성창수까지 다섯 사람의 뇌가 사라졌고 또 한 사람의 뇌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민선도 <바디 바자르>에서 한 번, 달섬에서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볼테르를 감시하고 민선을 보호하는 일만도 벅찼다. 엄격하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눈이 입술이 가슴이 출렁출렁 뜨거웠다. UFO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처럼 가까워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석범에게 민선은 너무 신경질적이었고 민선에게 석범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대충 인간'이었다.

너무 앞서 가진 말자. 겨우 입맞춤 두 번이니까.

석범은 마음을 다잡았다. 연애는 연쇄살인사건을 마친 후 천천히 진행해도 늦지 않다. 원활한 수사를 위해 두 사람이 말을 놓는, 맞선을 본, 입을 맞춘 사이임을 감추기로 했다. 앨리스는 괜히 화를 낼 것이고, 병식도 킬킬 입을 가리며 웃을 일이다. 석범과 사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선 역시 글라슈트 팀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 특히 볼테르라면, 글라슈트에 대한 정보 유출을 막는다는 핑계로 민선을 팀에서 쫓아낼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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