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52>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5월 30일 02시 59분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물가 안정에 주력하며 안정적으로 경제를 이끌었던 그는 1983년 10월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숨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물가 안정에 주력하며 안정적으로 경제를 이끌었던 그는 1983년 10월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숨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52>아아… 김재익

한은 자료 수집 부탁하며 첫 만남

경제기획국장 임명 관계 입문시켜

아! 아웅산 테러에 산화하다니…

내가 한국은행에 다니던 김재익을 처음 만난 것은 서강대에 있을 때였다. 그는 어느 날 연구실로 나를 찾아와서 초면 인사를 했다. 한문(漢文)에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백석정간(白晳精桿)이라는 말이 있는데 김재익을 보자 나는 이 문구가 생각났다. 얼굴이 희고 몸매가 날씬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정신과 사고가 매우 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유솜(USOM·미국 대외원조처)의 위촉으로 한국의 통화정책 개선방안을 연구하던 중이어서 그에게 한국은행의 통계자료 수집을 부탁했다. 그가 자료를 가지고 올 때마다 미국 경제학과 대학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경제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미국으로 가라고 조언을 했다.

마침내 김재익은 하와이대로 유학을 가게 되어 그곳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을 위해 스탠퍼드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1968년 내가 스탠퍼드대 대학원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게 되어 김재익을 다시 만나게 됐다. 거기에서는 김재익 외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곽수일(후일의 서울대 교수), 김대영(후일의 건설부 차관), 김윤형(후일의 동력자원부 기획국장,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의 수재를 만나 이들과 담론하며 실로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몇 년 후 김재익이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로 돌아와서 나를 찾아왔기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았다. 나는 당연히 대학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정부에 들어와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혀 거절하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그를 경제기획원(EPB)의 경제기획국장 자리에 앉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 직제(職制)에 따르면 기획국장 자리는 고등고시를 거쳐 관료의 승진 코스를 밟아온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일반직’이고 비서관과 같이 고등고시를 거치지 않고 장관과 진퇴를 같이 하는 ‘별정직’은 임명될 수 없는 자리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김재익을 우선 나의 비서관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료제도의 폐쇄성을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총무처 장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김용휴 총무처 장관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어 기획국장에 별정직 공무원도 임명될 수 있도록 직제를 개정했다.

예정대로 김재익을 경제기획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새로운 안목으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편성했고 기획원을 찾아오는 외국 신문기자나 기업인들에게 한국 경제의 실상과 개발계획을 재치 있게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 그로 인해 EPB의 대외적 이미지가 높아지고 동시에 투자유치에도 긍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전자교환기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위해 나를 크게 도와주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안정주의자였다. 경제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종종 전통적 관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수석비서관이 된 것은 한국 경제를 위해 크나큰 다행이었다. 그는 전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할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한국 경제의 숙제인 물가 안정화에 큰 몫을 했다. 물론 전 대통령의 영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3년 10월 전 대통령이 동남아시아 순방길에 버마(현 미얀마)에 들렀을 때 아웅산에서 북한이 공작한 폭탄테러가 발생해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김재익(경제수석비서관), 서석준(부총리), 하동선(해외협력 기획단장), 이기욱(재무부 차관)을 비롯해 이 나라 최고 인재들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결국 내가 김재익을 정부로 불러들여 그를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가! 그의 유족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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