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9년 5월 4일 02시 55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아(嗚乎)!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이 비문을 짓는데 문임(文任)의 신하를 버려두고 내 스스로 약략(略略·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은 또한 자식으로서 사친(私親·후궁 신분인 임금의 친어머니)의 삼가는 마음을 체득한다는 의미이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涕泗被面).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1744년 7월 영조(1694∼1776)는 어머니 숙빈 최씨(1670∼1718)의 묘에 ‘소령(昭寧)’이란 묘호(墓號)를 올리며 묘갈문(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의 비문)을 직접 지었다. 묘갈문에는 자신이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최근 펴낸 ‘숙빈최씨 자료집’에서 영조의 효심을 담은 비문인 ‘숙빈최씨소령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과 ‘화경숙빈소령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를 실었다. 이 비문들을 번역한 것은 처음이다.
1753년 영조는 숙빈 최씨가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어 무수리에서 후궁이 된 지 60년을 기념해 ‘화경(和敬)’이란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했다. 이때 세운 비석이 화경숙빈소령원비. 이 역시 영조가 직접 글을 썼다. 그는 비문에서 “즉위 29년 계유(癸酉) 6월 경술일에 시호를 올리고 원(園)으로 격상하였다. 아! 올해는 사친께서 봉작(封爵)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의) 앞뒷면 모두를 눈물을 삼키며 쓰다”라고 적었다.
자료집에 ‘사친을 위한 영조의 추숭(追崇) 기록’이란 논문을 실은 윤진영 장서각 연구원은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데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극진한 효행과 추숭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며 “그는 ‘평생토록 고집한 바가 다만 충(忠)과 효(孝)를 아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효심이 각별했다”고 설명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