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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18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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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 거동불편 8순 할머니 - 외국인 신자들도 눈길
李대통령 “어렵고 힘들때 사랑하고 나누라는 가르침 남겨”
치료했던 병원장 “金추기경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 반대”
○…빈소인 명동성당에 오전 6시부터 신도와 시민들이 몰려들면서 조문까지 평균 두세 시간, 많게는 서너 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렸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더욱 떨어졌지만 두꺼운 외투와 장갑, 목도리로 중무장한 조문객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울대교구는 유리관에 안장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려는 행렬이 길어지자 명동성당 입구 앞에서 ‘목례만 하세요’라는 안내판을 들고 조문객들을 입장시켰다.
○…영하의 추위에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 중에는 가족이 함께 온 경우가 많았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김영호 씨(48)는 아들 동환 군(18)과 함께 왔다. 김 씨는 “오는 데 1시간 반가량 걸렸지만 훌륭한 분을 조문하는 것이 아들 인생에 있어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선물이 될 것 같아 데리고 왔다”고 했다.
배상환(45) 이시정 씨(40·여) 부부는 경기 용인시에서 아들 준환(15) 재영(12) 군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배 씨는 “추기경님이 마지막 길을 가시기 전에 가족과 함께 배웅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아들 재영 군은 “추기경님을 뵈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날씨가 추워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인천에서 가족과 함께 온 이관규 군(12)은 성당 앞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1시간 반 걸려서 왔고 기도와 미사를 드리는 데 3시간이 더 걸렸다”며 “추기경 할아버지가 누워 계신데 돌아가신 것 같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를 지니거나 몸이 불편한 추모객도 많았다. 시각장애인 사미경 원정미 씨는 명동성당 지하성당에서 인파에 떠밀려 길을 잃었다가 다른 조문객의 도움으로 자신들을 안내해주던 일행과 가까스로 만났다. 사 씨는 “늘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주셨던 분이 추기경님이었다. 우리는 그 마음을 깊이 알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라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 83세의 노모 김정수 마리아 씨를 부축해 온 김해룡 씨(64)는 추위에 떠는 어머니의 두 팔을 문지르며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40년 된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께서 ‘꼭 가봐야겠다’고 해서 모시고 왔다”고 했다. 어머니 김 씨는 “이전 추기경님을 직접 뵌 적이 있었지만 더 찾아뵙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라며 빈소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외국인 신자들도 명동성당으로 왔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근무하는 마이클 씨(50)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이곳에서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한국 정부에서 근무한다는 미국인 로이 씨(55)는 “몸이 아파 함께 오지 못한 아내 몫까지 조문을 했다”며 “김 추기경은 생전에 참 많이 웃는 분이셨고 지금도 웃고 계신다”고 말했다.
성당 앞 호텔에 투숙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은 성당 정문 앞을 지나 명동거리에 길게 늘어선 조문객 행렬을 디지털카메라에 담으며 “대단하다” “놀랍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조문객을 구경하기 위해 성당 안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김 추기경이 어떤 인물인지 묻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문록에 ‘우리 모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쓴 뒤 영접을 나온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 사제관으로 자리를 옮겨 고인을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성탄절 날 뵐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는 말씀도 나누시고 하셨는데…”라고 아쉬워했다. 그러자 정 추기경은 “그때가 사실상 마지막이셨다. 그 뒤로는 기력이 떨어져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고 했다. 정 추기경이 “김 추기경께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많이 하셨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40년 전 추기경이 되셨을 때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감이 없었을 때인데 한국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어렵고 힘든 때에 국민에게 사랑하고 나누라는 큰 가르침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성모병원 황태곤 병원장은 17일 김 추기경이 생전 생명의 존엄성을 늘 강조했지만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황 병원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추기경의 말씀에 따라 이 같은 상황을 서울대교구에 공증을 해 달라고 했다”며 “이후 공증서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교구청에서 동의해줬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 추기경이 선종할 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아 진통제를 놓거나 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공식 성명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뿐 아니라 이 나라의 큰어른이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안에 잠들었다”며 “평생을 말과 행동으로 자비의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자 온 힘을 다한 이 충실한 착한 목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주교단은 이어 “꾸밈없고 소박한 인간다움으로 모두의 마음에 친근하게 와 닿았을 뿐 아니라 ‘바보야’를 그릴 정도로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며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사람을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통감하며 ‘주님, 죄인 김수환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