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따끈한 아랫목이 그립습니다

  • 입력 2009년 1월 24일 02시 56분


‘퇴근길’ 장용길, 그림제공 포털아트
‘퇴근길’ 장용길, 그림제공 포털아트
그가 퇴근했을 때 세상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서 오랜만에 눈을 맞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실직 후 가까스로 얻은 새 직장에서의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일자리를 얻은 걸 그는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눈이 내리니 어딘가 따뜻한 선술집에라도 들어가 목을 축이고 싶지만 선뜻 가고 싶은 곳이 없습니다. 술집은 많지만 마음을 풀고 앉아 있을 만한 집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은 퇴근길에 대폿집에 들러 피로를 풀었습니다. 흰 사발이나 노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 투명한 소주병과 노가리, 생두부, 깍두기 같은 안주가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얼근하게 술에 취하면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며 골목으로 들어서곤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 어른거립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아랫목 이불 속에다 밥사발을 묻어두곤 했습니다. 미리 차려둔 밥상에는 조각 밥상보가 덮여 있었습니다. 노란 백열전구 등빛 아래서 형제자매들은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소리 내 책을 읽곤 했습니다. 잘 먹고 잘살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는 삶에 온기가 있었습니다.

도심의 유흥가 불빛이 휘황합니다. 예전에는 가정집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그것은 사라지고 요즘은 이상한 집이 유흥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호프집 순대집 고깃집 횟집 오뎅집 족발집…. 유흥가에는 집만 널린 게 아니라 방도 많습니다. 노래방 소주방 비디오방 PC방 대화방 찜질방 모텔방…. 세상의 집과 방이 모두 거리로 나앉은 것처럼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이 들락거립니다.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집과 방에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급식 빵을 타 먹고, 입을 옷이 없어 팬티와 러닝 차림으로 나가 놀았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넘쳐 비만과 입던 옷 버릴 걱정을 합니다. 집이 가구 수보다 많은데도 숱한 사람이 집 문제 때문에 발을 뻗고 자지 못합니다. 산동네 달동네에 살던 시절에도 어른들은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며 잘 살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맞고 걸으며 배회해 보지만 아무 곳으로도 발길이 가 닿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까, 망설이지만 그곳에도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 학원비 걱정으로 아내는 맞벌이를 나갔고 아이는 학원에서 입시준비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을 배회하다 동네 어귀로 접어듭니다. 가로등 빛을 맞으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노라니 인생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 피로에 지친 몸을 눕힐 수 있는 따뜻한 방 한 칸이 간절한 시절입니다. 그 많던 집, 그 많던 방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작가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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