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 진가 알리려 흙 대신 글 빚었죠”

  • 입력 2008년 4월 30일 03시 00분


1994년 6월 일본 교토(京都) 다이도쿠(大德)사 고호(孤蓬)암. 젊은 사기장(沙器匠) 신한균(당시 35세) 씨가 상자 하나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상자가 있었다. 이렇게 네 차례나 상자를 열고서야 자줏빛 비단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비단을 풀자 평범하고 소박한 사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이 비뚤어져 있고 아래가 굽은 오돌토돌 못생긴 사발. 하지만 ‘그릇쟁이’의 가슴은 이미 조선시대 사기장의 예술혼으로 출렁거렸다.

“우리 흙과 유약이 아니고서는 저런 노란빛을 낼 수 없다!”

조선에서 약탈해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喜左衛門) 이도다완(井戶茶盌)’. 오묘한 노란빛을 띤다고 해서 황도(黃陶)라 불리는 조선 사발이었다. 신한균 의 아버지는 지난해 작고한 신정희 씨.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간 맥이 끊긴 황도를 1968년 재현해 명성을 얻은 사기장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장인들이 그곳에 전해준 황도는 일본 무사들 사이에서 “성(城)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최고 다완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황도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일본 역사서가 수많은 조선 장인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왔다고 왜곡하는데도 이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는 없다시피 했죠. 아버지는 ‘황도의 가치를 한국 사람이 알게 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죠.”

신 씨는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에 새겼다. 일본 내 황도를 찾아 조선 장인들의 흔적을 추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여 년 동안 신 씨는 일본 전역의 박물관, 도자기 생산지, 가마터를 찾았다.

그렇게 해서 발굴한 조선 장인들의 잊혀진 예술혼이 최근 소설 ‘신의 그릇’(전 2권·아우라)으로 태어났다. 조선의 사기장 신석이 일본으로 끌려가 삶과 죽음을 오간 끝에 진정한 황도를 완성해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

29일 오후 서울 덕수궁에서 신 씨를 만났다.

“사람들이 쉽게 황도의 가치를 접하려면 소설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2년 동안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밥을 거르기도 하며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몸무게가 15kg이나 빠지더군요.”

평생 그릇만 빚어온 ‘사기쟁이’에게 소설이 잘 써질 리 만무했다. 고민 끝에 시나리오 작가, 시인, 수필가 등 지인들에게 원고를 보여줬다. 어떤 이는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했고 주인공의 기행문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고치고 또 고치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지난해 6월에는 유일하게 소설 쓰는 일을 독려하던 아버지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글을 잘 몰라 할 수 없었던 일을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셨는데….”

신 씨에게 이 소설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셈. 신 씨는 황도가 막사발로 통용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조잡한 조선의 밥공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근거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황도가 막사발이었으면 우리나라에도 많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없죠. 황도는 경남 진주 지역에서만 만들어진 민간 제기(祭器)였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으로 맥이 연결된 진주의 흙만이 이런 오묘한 노란빛을 낼 수 있습니다. 일본 도예가들은 아무리 흉내 내고 싶어도 못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데 저의 소설이 조금이라고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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