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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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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이런 궁금증을 토대로 근현대기에 제작된 퇴계의 다양한 초상화와 조각상을 살펴봤다. 최 교수는 26일 대구 중구 남산1동 대구향교 유림회관에서 열리는 ‘2008년도 상반기 영남퇴계학연구원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문 ‘퇴계의 초상화에 대하여’를 발표할 예정이다.
최 교수가 살펴본 퇴계 초상은 △일제강점기 경성산부인과병원장이었던 구도 다케시로(工藤武城)가 소장했던 ‘퇴계선생 초상’(작자, 제작 시기 미상) △이유태 화백(1916∼1999)의 퇴계 초상화(1974년 작) △중국 무이서원에 있는 퇴계 초상화(작자, 제작 시기 미상) △서울 남산의 퇴계 동상(1970년 작)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의 퇴계 얼굴 조각상(2004년 작) 등.
한 인물의 얼굴을 표현한 다양한 초상화와 초상 조각을 대상으로 연구 논문을 발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최 교수는 이들 이미지의 비교 검토를 통해 퇴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고찰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퇴계 초상은 구도 소장 ‘퇴계선생 초상’. 최 교수는 이 초상화가 1934년 출간된 ‘일본의 교육정신과 이퇴계(日本の敎育精神と李退溪)’라는 책에 수록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퇴계가 온후했다’는 각종 기록과 달리 이 그림 속의 얼굴은 차가울 정도로 엄격하고 강직한 모습이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복장은 문인이지만 얼굴은 무인의 이미지로 표현해 퇴계를 일본의 정신사 속에 편입하려 했던 당시 분위기를 반영한 초상화”라고 분석했다.
이 화백의 퇴계 초상은 1000원권 지폐 속 퇴계 초상의 원본이다. 이 그림 속의 퇴계는 복건 차림에 지나치게 파리하고 병색이 완연하다. 최 교수는 “퇴계가 정자관을 좋아했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 데다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로 퇴계를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현대기에 제작된 조각상에서 밝은 분위기로 변했다. 최 교수는 “남산의 퇴계 동상, 영주 소수서원의 얼굴 조각상은 병색이나 피로한 모습에서 벗어나 온화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면서 “이는 일제에 의해 부정적으로 폄훼되어 온 퇴계의 이미지가 새롭게 재탄생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