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센’ 작품뒤 가벼운 작품 ‘파도타기’

  • 입력 2008년 3월 28일 03시 02분


《“벽에 있던 가족사진을 내리고 500만 원을 투자해 조그만 그림 액자 하나 걸어놨으면 좋겠어요.”(50대 은행 간부) “지금은 돈이 없어 못 사지만 미술전시회를 다니거나 도록을 보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영어학원 강사 금수경 씨) “계모임이나 신입사원 연수 때도 미술강연 요청이 들어옵니다.”(미술평론가 경희대 최병식 교수)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다. 마침 25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스페이스에서 ‘제110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가 열려 현장을 참관했다. 주요 작가의 작품이 많이 선보여 올해 미술계 동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첫 메이저 대회였다. 찬바람이 불고 비도 간간이 흩뿌렸지만 경매가 시작되는 오후 5시에는 500여 명이 모였다.

▶dongA.com에 동영상》

▼미술품 경매 현장 참관기▼

○ 첫 3, 4개는 흥행작품 골라 올려

스크린을 통해 작품, 제목, 작가, 추정 가격이 뜨면서 경매가 시작됐다. 첫 경매사는 지금껏 경매를 120여 회의 진행한 박혜경 이사다.

첫 주자는 젊은 작가군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홍경택의 ‘이지보이’. 10호 그림의 추정가는 800만∼1200만 원. 첫 가격은 650만 원에서 시작됐다. 고객들이 어지럽게 번호판을 올렸다. 모두 11번의 가격이 불려졌다. 700, 750, 800, 850으로 이어지던 숫자는 1350에서 멈췄다. 이렇게 모든 작품은 추정가보다 조금 더 낮은 가격에서 출발해 추정가를 넘어서면 낙찰되는 경우가 많다.

“첫 3, 4개 작품은 가장 흥행이 잘될 법한 작품들로 골라 올립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법칙’을 따른다고 할까요.”

경매 전 박 이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동기의 ‘국수를 먹는 아토마우스’, 안성하의 두 작품도 끈질긴 경합 끝에 높은 가격에 팔렸다.

사겠다는 사람이 더 없으면 경매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는 손짓을 하며 “2800? 2800? 2800?” 하며 마지막 가격을 세 번 확인했다. 가격을 각인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이래도 더 부르지 않을래?’하는 유혹의 느낌도 받는다.

경매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경매 4시간 동안 참가자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경합이 많이 붙는 작품을 어느 정도 선보이면 살짝 힘을 빼도 되는 작품을 배치하는 식으로 리듬을 탄다. 이날은 전략이 대충 맞아떨어졌다. 연달아 5번 이상 유찰된 적이 없었다.


촬영·편집=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 박영대 기자

경매에서 경매사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해야 하지만 너무 권위적이어서는 안 된다. 고민하는 고객이 눈에 띄면 “한 번 더 부르셔야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라며 대놓고 설득한다. 수십만 원에서 수십억 원까지 가격대는 천차만별이다. 작품도 다양하므로 경매사는 숫자가 헷갈려서는 안 된다. 작품에 따라 10만∼2000만 원씩 계단식으로 올리는 숫자를 흐름에 맞게 언제 가격 단위를 바꿀지도 결정해야 한다.

이날 경매에서는 총 5명의 경매사가 선보였다. 일부는 고객이 든 번호판을 놓쳐서 항의받기도 했다. 잘 진행하는 사람도 간간이 물을 마시는 걸 보면 ‘피 말리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 회원제 운영… 화랑 소유주들 많고 외국인도 가끔 참여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경매회사에 연간 10만 원가량을 회비로 내는 회원이어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딸, 아내와 함께 이날 경매에 참가한 변리사 이모(48) 씨는 지난해부터 미술품 투자를 시작해 벌써 10여 점을 모았다. 그는 주식은 너무 투기 같아서 하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 경험은 있다. 이 씨는 “아직 한 작품도 이익을 실현하지 않았으며 밤에 깨어나 작품을 들여다보면 뿌듯하다”며 “미술품 투자를 하다 보면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문화를 즐긴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매를 하다 보면 열기에 빠져 생각한 것보다 더 부르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그런 착오를 경험하고 이 씨 가족은 올해부터 ‘예상치보다 500만 원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날 마지노선은 대체로 지켰다.

일본인, 영국인 등 외국인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홍콩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는 영국인 로디 롭넬 씨는 “크리스티 등 그동안 경매현장에 자주 갔지만 실제 경매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꽤 흥미롭다”고 말했다. 한국말을 못하지만 전광판을 통해 숫자를 확인해 가며 몇 번 번호판을 들던 롭넬 씨는 인기 있는 주요 작품이 출품되는 1부 행사가 끝날 무렵 자리를 떴다. 그는 “총거래액수는 모르겠지만 열기만큼은 크리스티 경매장 못지않다”고 귀띔했다.

나눠받은 경매도록의 요약본에 낙찰가와 유찰 여부를 적으면서 ‘공부하는’ 50대 아줌마들도 눈에 띄었다.

화랑 소유주도 많았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미래화랑 소유주 장히지나 씨는 화랑의 단골 고객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매로 미술품을 거래하면 사거나 파는 쪽 모두 경매회사에 수수료를 11% 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수수료를 물더라도 가격이 투명하고 사후 관리가 철저한 경매를 선호하기도 하고, 가격정보야 인터넷을 두드리면 나오므로 단골관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세금 무풍지대’ 화랑을 선호하기도 한다. 초보자를 위해 장 씨는 “화랑에서 여는 기획전을 이용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100만 원 전’ 등 유명 화가의 소품 위주 작품을 모아서 내놓는 행사에는 시중 가격보다 30% 가량 싼 작품이 많다고 한다. 몸집이 가벼워 나중에 경매를 통해 되팔기도 좋다.

“낙찰입니다!”

의사봉을 책상에 내리치는 276번째의 ‘탕!’ 소리와 함께 오후 9시 총 4시간의 드라마가 끝났다. 결과는? 지난해는 총낙찰률이 90%를 넘기기도 했지만 이날은 63%에 그쳤다. 박혜경 이사는 “욕심을 부려서 작품을 너무 많이 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증’된 작가들의 작품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며 새 주인을 만났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촬영·편집=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 박영대 기자

▼경매 관전포인트▼

위작논란 이중섭 여전한 인기

이번 경매에는 5가지의 관전 포인트가 있었다.

위작(僞作) 논란이 있었던 이중섭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가 관심이었다. 유화 2점은 각 10억 원, 15억 원에 낙찰돼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국내 미술시장을 이끌어온 국내 근대작가들(박수근 도상봉 천경자 등)이 인기를 이어갈 것인가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작품이 대부분 유찰된 김환기를 제외하면 성공적이었다.

중국 등 해외 미술의 인기도 여전했다. 야요이 구사마의 ‘호박’ 시리즈, 앤디 워홀의 작품들, 인쥔의 ‘울음’ 시리즈, 웃는 얼굴이 독특한 웨민쥔의 작품(사진)도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해외 미술의 경우 국력이 미술품 가격에 반영된다. 러시아 경제가 살아나면서 샤갈 작품의 국제시세가 급등한 게 대표적인 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인도를 주목하라는 얘기도 있다.

해외 미술품의 가격정보는 인터넷사이트 www.artnet.com이나 artprice.com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크리스티 경매 등 해외 시장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2006년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다 지난해 말부터 인기가 주춤했던 이우환 오치균 등 현존 작가군의 선두주자들도 주시대상이었다.

고미술의 인기는 새로운 현상이다. 2005년만 해도 가장 비중이 컸던 고미술 분야는 최근 미술시장이 근현대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지면서 관심이 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찰되는 작품이 비교적 적었다.

경매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가 일어나므로 경매가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재경매되는 작품도 있다. 이번에는 1부에 2점, 2부에 3점이 재경매에 부쳐졌다. 고객이 중요한 전화를 받다가 놓친 경우도 있고 경매사가 착각한 경우도 있다. 간혹 자리에서 너무 일찍 일어나 노리던 작품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경매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말고 1∼2년은 공부를 하며 작품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경매회사들은 경매로 거래된 작품은 3년 안에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3년 이상은 묵히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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