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학, 추사 앞에 유득공

  • 입력 2007년 10월 8일 03시 00분


신라 진흥왕의 4대 순수비 중 가장 북쪽에 있는 6세기 황초령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웠으나 지금은 함흥의 함흥본궁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신라 진흥왕의 4대 순수비 중 가장 북쪽에 있는 6세기 황초령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웠으나 지금은 함흥의 함흥본궁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시대 최초의 본격 금석(金石)학자는 18세기 유득공이다. 금석문을 통해 신라 진흥왕의 ‘진흥(眞興)’이 시호(諡號·죽은 뒤에 붙은 이름)가 아니라 생전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사람은 추사 김정희가 아니라 유득공이었다. 추사의 위대한 금석학도 유득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의 금석학자로서의 면모를 처음 규명하고 이를 통해 조선 금석학 발달사를 새롭게 조명한 연구 성과가 나왔다. 유득공을 금석학자로 고찰한 논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 씨는 최근 열린 유득공 사거(死去)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대동한문학회 주최)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조선 금석학사에서 유득공의 위상’을 발표했다. 금석학은 금속(철기 동기 등)이나 돌(석비 묘비 인장 등)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박 씨는 유득공의 글에서 그가 금석문을 직접 해석하고 연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 ‘신라 진흥왕 북순비(北巡碑)’ ‘신라 삼잔비(三殘碑)’ 등의 시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북순은 북쪽을 순수(巡狩·국왕이 나라 곳곳을 살피며 돌아다님)한다는 뜻. 유득공은 당시까지 서예 훈련의 수단이나 감상의 대상에 머물렀던 금석문을 역사 연구 사료 즉, 학문 연구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박 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금석학도 유득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했다. 추사는 1816년 북한산 비봉에 있던 석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 진흥이 시호가 아니라 생전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박 씨는 “유득공이 이미 1798년 진흥왕 북순비(지금의 황초령비)를 검토한 결과 진흥이 생전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유득공은 저서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등에 ‘진흥왕이 북순했을 때 즉, 살아있을 때 세운 비에 진흥왕이라고 나온다면 그건 시호가 아니다’라는 의미의 글을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박 씨는 이어 “추사가 유득공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실이 사료 곳곳에서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추사의 금석학은 유득공의 연구 성과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그동안 뛰어난 역사학자와 문학가로 이해되어 왔으나 금석문 연구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박 씨는 논문의 결론에서 “이제는 유득공을 금석학자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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