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추기경 “나라의 마지막 권위마저 실종돼 걱정”

  • 입력 2007년 9월 2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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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 중인 정진석 추기경이 19일 낮 미국 워싱턴 근교의 한 식당에서 한국 언론사 워싱턴 주재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미국을 방문 중인 정진석 추기경이 19일 낮 미국 워싱턴 근교의 한 식당에서 한국 언론사 워싱턴 주재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워싱턴에 가족은 함께들 와 있는 건가요?"

19일 정오 미국 워싱턴 근교의 한 식당.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워싱턴특파원단과의 간담회를 이 질문으로 시작했다. 미국 방문 목적인 워싱턴 국립대성당 '한국 성모자 및 순교자 부조상' 설치 축복미사에 관한 설명 보다 "특파원들이 일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염려한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의 기본은 가족"이라는 설명과 함께.

한국 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사회 원로인 정 추기경은 이날 한국 사회, 정치, 종교 전반에 대해 쏟아지는 질문들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쉽고도 간결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최근 납골당 건설을 이유로 추기경이 탄 차에 계란을 던진 일 등 한국사회에서 권위가 무시되는 현상이 걱정스럽다는 질문에 정 추기경은 "사람은 다 결점이 있고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므로 절대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며 말을 이어갔다.

"권위는 사람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전체가 인정하는, 즉 민심이 천심이라 할 때 그런 민심이 부여하는 것이지요. 다만 미국에선 '법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면 그걸로 끝인데 한국에선 법관 판결에 달려들기도 해요.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가 진정으로 발전하려면 국민 전체가 인정하는 마지막 권위는 있어야 하는데…그런 권위의 실종이 아쉽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누구나 인정하는 권위가 있어야 행복과 연결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학력 위조파문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정 추기경은 "부풀려서 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며 "물론 (학력을 위조한) 본인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사회 전체가 정직한 사회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물의를 빚은 종교 관련 각종 사태들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되듯이 내 종교를 위해 다른 종교에 피해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예수님께서는 '네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줘라'고 하셨다. 내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 이익도 생각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추기경 서임 이후 생활에 달라진 것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추기경은 교황을 보좌하는 참모이므로 교황께서 한국과 동북아 문제에 많은 걸 물어 오신다"며 "답변을 준비하면서 내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구나, 너무 자격이 없구나 하는 걸 실감한다. 이건 겸손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답변서를 쓰면서 항상 송구스런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공부벌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톨릭 내 석학으로 꼽히며 저서와 번역서만 45권이다

정 추기경은 올해 아시아 2명을 포함해 전 세계 15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되는 교황청 감사위원이 됐다. 한 관계자는 "한국 천주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 경제 등 사회현실에 대한 발언을 자제하는 이유에 대해 정 추기경은 "정치, 경제 문제는 가치관이 상대적이어서 절대적 의견이 존재하기 어렵다. 더 낫다는 차원이지 이것만이 옳다는 건 불가능하며 오십보백보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절대적인 가치인 생명윤리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최대 성당이며 관광 명소인 워싱턴 국립대성당에 순교로 꽃피운 한국 가톨릭 신앙을 상징하는 성모자, 순교자 부조상이 영구 설치됐다.

약 10만 명에 달하는 미국 내 한인 가톨릭 신자들은 4년여에 걸친 모금과 준비 끝에 워싱턴 대성당에 한국 성모자, 순교자상 건립을 마치고 22일 오후 1시 정진석 추기경 집전으로 축복미사를 거행한다.

대성당 입구 바로 왼쪽에 설치된 순교자상(최의순 작)은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 양쪽으로 남녀 순교자가 순교 직전 절규하는 모습이다.

입구 오른쪽에 설치된 성모자상(임송자 작)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 마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담았다.

이들 작품에 나오는 예수와 마리아는 한국의 전통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으며, 술 항아리도 전래의 오지그릇 형상이다. 각각 너비 3.58m 높이 2.44m이며 한국에서 부조 틀을 만든 뒤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에 새겼다.

미 카톨릭 주교회의는 2003년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 성모자, 순교자상 설치를 승인한 바 있다. 워싱턴 대성당엔 이민자의 나라를 상징하는 70여 개국에서 만든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정 추기경은 "1849년 건립된 워싱턴 국립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당(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이며 명동대성당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주 보호성인이 성모 마리아"라며 "한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설치된 부조상의 축복미사를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때 서울대교구장이 된 제가 하게 된 것도 그렇게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는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난 존재임을 뜻한다고 정 추기경은 설명했다. 여기서 원죄는 사람들이 짓는 그런 죄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향을 의미한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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