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여라, 1500년 전 ‘사랑의 시어’

  • 입력 2007년 2월 14일 02시 58분


‘항상 두려운 건 가을철이 되어/서늘한 바람이 불꽃 더위 뺏는 것/상자 속에 버려져/은혜로운 사랑 중도에서 끊기는 것.’

이는 한시(漢詩)의 오언시 형식을 정립한 작품으로 꼽히는 중국 한대 ‘원시(怨詩)’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랑하는 임의 품과 옷소매를 드나드는 비단부채에 자신을 투사해 여름에는 그토록 총애를 받다가 가을이 되면 버려지는 실연의 아픔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를 쓴 주인공은 반첩여(班X여)다. 그는 전한 말엽의 황제인 효성제(孝成帝·기원전 33년∼기원전 7년)의 애첩이었으나 다른 후궁에게 밀려 고독한 여생을 보내다 효성제의 무덤에서 쓸쓸히 숨진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여인이다.

지난주 나란히 출간된 이철리 경남대 교수의 ‘역주 시품’(창비)과 권혁석 충주대 교수의 ‘옥대신영’(소명출판·전 3권)에서 우리는 이 반첩여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두 책은 중국문학사의 고전으로 꼽히는 종영(鍾嶸)의 ‘시품(詩品)’과 서릉(徐陵)이 엮은 ‘옥대신영(玉臺新詠)’을 각각 주역한 작품이다. 시품은 ‘문심조룡(文心雕龍)’과 함께 중국문학 평론의 양대 원류로 꼽히는 작품이고, 옥대신영은 여성 취향의 사랑노래 중심으로 엮었지만 중국문학사에서 ‘시경’과 ‘초사’ 다음으로 오래된 시집이다.

이들 책은 3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그중에서도 양무제(502∼549) 시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정치적으론 혼란기였지만 예술적으론 가장 자유분방하고 창조적인 시기였다. 둘째, 오언시 작품과 작가들에게 집중돼 있다. 오언시는 한대에 유행했던 서사적이고 남성적인 산문체의 부(賦)와 달리 서정적, 여성적, 음악적이다. 셋째, 책 속의 상당수 시인이 겹친다. 시품이 한대부터 양대까지의 시인 123명을 예술성을 기준으로 상품-중품-하품으로 나눠 평했다면 옥대신영은 같은시대 감상적 연애시를 기준으로 115명의 작품 667수를 선정했다.

반첩여는 이런 두 책을 잇는 고리 중 하나다. 시품에서는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을 중품으로 분류하면서도, 반첩여는 ‘원시’ 단 한 편만으로도 여성 시인으론 유일하게 12명의 상품 시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시품은 작가론이어서 구체적인 작품은 실려 있지 않다. 반첩여의 ‘원시’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중국 고대의 ‘로맨스 시집’ 격인 옥대신영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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