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아직 다 못 비워… 사진 찍지 마세요”

  • 입력 2006년 12월 21일 03시 01분


《그는 오지 말라고 했다.

사진도 찍지 말라고 했다.

“와 봐야 기사가 안 될 거라고….”

경기 양평군 양평읍 봉성리 나지막한 야산 산등성이에 위치한 성실(聖實)교회 이정훈(45) 목사.

그는 잘나가는 ‘목사님’이었다.

전통문화와 예배의 접목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여기저기 강연 및 원고 요청에 바쁘게 살았다.

어느 날 밤, 뭔가가 잠을 깨웠다.

문득 “너 뭐 하고 있니”라는 질문이 어수선한 머리를 강타했다.

“이렇게 목사들이 가는구나.”

더럭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온 것이 4년 전이었다.》

신도는 모두 10명, 한 달 생활비는 15만 원. 얼마 전에는 생활비를 올려주겠다는 신도들과 옥신각신했다. 올릴 필요 없다고…. 그래도 얼굴에는 가난함과 곤고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이 맑다. 이웃 교회 목사님에게 “당분간 전도는 안 하겠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 목사의 얘기를 듣고 찾아오는 다른 교회 신도들도 발길을 돌려야 한다. “교회 간 수평이동은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신도도 100명이 넘으면 50명씩 갈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신축 중인 교회도 딱 50명이 앉을 수 있게 짓고 있다.

그가 시골로 내려온 이유는 목회도 하고 ‘예수향기 풍류마을’이라는 청소년 캠프도 열기 위해서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목회를 할 때 그는 문화원을 열고 장애아, 혼혈아, 비행청소년, 해외교포 등에게 전통문화를 가르쳤다. 그렇게 거쳐 간 아이들이 70여 명에 이른다. 또 1990년대 초에는 1년간 미국을 돌며 교포 청소년들에게 풍물을 전수해 미국 전역에 ‘풍물 바람’을 일으켰다.

이 목사의 경력은 다채롭다. 숭실대 전산학과를 졸업했지만 컴맹이다. 대학 때부터 전통문화에 미쳐 살았다. 강령탈춤을 배우기 위해 박동신 선생 집에서, 서도소리와 태평소를 배우기 위해 김정복 선생 집에서 10여 년간 이리저리 떠돌며 ‘머슴살이’하듯 소리와 춤을 배웠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활동을 할 때는 전국을 돌며 ‘마을 굿’과 ‘전래 소리’를 채집했다.

목회자들의 영성 회복과 치유를 위해 ‘씨알 수도회’를 열었고 성실예배교육문화원을 만들어 ‘국악이 있는 예배’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한국인의 흥을 돋우는 전통가락을 사용하면 예배가 활연관통(豁然貫通·환하게 통하여 도를 깨달음)하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라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

이 목사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교회도 ‘각(角)’을 없애고 둥글둥글하게 지었다. 내년에는 그가 그렇게도 원하던 풍류마을을 정식으로 연다.

이 목사는 “복음의 핵심은 낮은 곳에 임하는 것이고, 예수 정신의 기본은 낮은 눈높이”라고 강조한다.

“왜 사진을 못 찍게 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이 내 맘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진이 나가면 제가 무너질 것 같아서입니다.”

그는 간절하게 양해를 구했다.

양평=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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