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신춘문예]중편소설 당선작(요약) ‘오란씨’ - 배지영

  • 입력 2005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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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공성훈
그림 공성훈
이제 막 26세를 넘긴 그는 15t 덤프트럭 운전사다. 어린 시절 고모의 돈을 훔쳐 집을 뛰쳐나온 그는 카센터와 공업사 등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이어 갔다. 제대로 된 임금 한번 쥐어 보지 못하며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던 그는 성인이 되어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운전대를 잡았다. 시내바리로 운전을 시작한 그는 손에 고린내가 날 정도로 열심히 운전을 했다. 파업 기간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동료들이 욕을 하고, 응징을 가해도 악착같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에게는 꿈이 있다. 15t 덤프트럭 차주가 되는 것 그리고 순희와의 새로운 삶이 그것이다.

모래내 공중변소집 둘째아들이었던 그에게는 이복형이 있다.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던 형은 보신탕집을 하는 고모집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개를 잡았다. 그의 아비는 대가로 좋아하는 개고기를 입에 누린내가 날 정도로 먹어댔다. 그리고 모래내 시장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류형사에게 보신탕을 바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아비는 그의 어미를 때려 죽였으나 류형사는 이를 무마시켜 주었다.

88 서울올림픽이 시작될 무렵 모래내에는 술과 여자를 파는 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 ‘오란씨’라는 매미집에 미스코리아 예선 탈락자 설희가 들어왔다. 그는 설희를 연모했으나 형도 역시 설희를 사랑했다. 하지만 류형사의 성 상납에 설희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류형사의 가학적인 성행위에 시달리는 설희를 보며 형과 설희는 야반도주를 결심한다. 떠나기 전, 형은 류형사를 개잡는 자루에 넣어 쳐 죽이고 공중변소에 시체를 유기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후 어른들은 형과 설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다. 다만 형이 ㅍ시로 갔다고만 생각했다.

형이 떠난 얼마 뒤 그 역시 고모의 돈을 훔쳐 도망치듯 모래내를 빠져나왔다. 그 후 그는 개처럼 살았다. 모두들 그를 개 취급했고 그 역시 그런 취급을 당연시 여겼다. 그런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단 한 사람. 우연히 들렀던 ㄷ휴게소에서 만난 순희였다.

ㄷ휴게소 식당 주인의 의붓딸인 순희는 지능이 약간 모자랐다. 서른은 좋이 되어 보이는 순희는 아무에게나 음료수나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고 까닭 없이 웃기를 잘했다. 가끔은 짓궂은 운전수들에게 희롱까지 당하는 순희가 안쓰러워 여러 번 먹을 것을 사주며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순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만 지었다. 식당 주인여자는 그에게 순희를 맡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역시 그를 등치고 달아났던 그저 그런 여자들보다 순희가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그에게 중요한 날이다. 며칠 전 받은 어음을 회사로 들어가서 할인받아 밀린 할부금을 갚고 나면 15t 덤프트럭은 그의 것이 된다. 더는 예전 그의 사수였던 신씨 명의로 된 덤프트럭을 모는 것이 아닌 당당한 15t 덤프트럭의 차주가 되는 것이다.

밀린 할부금 독촉 전화와 파업의 삼엄함에 조바심이 났지만 그는 저녁을 해결하고 순희도 볼 겸 ㄷ휴게소로 향했다. 파업 첫날이라 동료들의 눈을 피해 먼 길을 돌아 조금 늦게 도착한 ㄷ휴게소에서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화장실 옆 풀밭에서 서너 명의 폭주족들에게 순희가 성폭행을 당하고 있던 것이다. 달려들어 싸웠지만 오히려 그는 심하게 얻어맞는다. 순희를 진정시키고 분한 마음에 덤프트럭을 몰고 따라가 보지만 이내 놓치고 말았다.

그는 일단 회사로 가야 했다. 어음 할인을 받으려면 늦어도 10시까지는 가야했다. 울분과 기대가 얽혀 머리는 복잡했지만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 보았다. 텅 빈 국도를 달리던 그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를 본다. 환상이었다. 순간 환상을 가르며 폭주족들의 오토바이가 다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폭주족들은 도리어 그의 덤프트럭의 진로를 방해하며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덤프트럭 옆에 바짝 붙어서 퍽큐를 날리기도 하고, 지그재그 지랄선을 그으며 그를 더욱 몰아간다.

그때 회사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할인받으려 했던 어음이 부도가 났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덤프트럭의 원 소유주인 신 씨가 밀린 할부금을 이유로 차를 회사에 넘겼으니 차를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깊은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로 그는 이성을 잃고 만다. 핸들을 돌려 폭주족들을 깔아뭉개 버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속도를 높였다.

폭주족들과 숨가쁜 추격전을 벌이던 그는 벼랑 끝 가드레일에 있는 폭주족의 오토바이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러다 얼핏 스쳐 지나는 낡은 오토바이의 환상을 다시 봤다. 거기에는 형과 설희가 타고 있다. 환상 속에서 형과 설희는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오색의 오로라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형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그의 몸이 가볍게 떨린다. 이미 그의 덤프트럭은 가드레일을 뚫고 있었다.

그는 차창 가득 떨어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설희와 형과 함께 먹었던 오란씨를 떠올려 본다.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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