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박사 “충무공처럼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

  • 입력 2005년 12월 1일 03시 01분


4년간의 작업 끝에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번역본을 펴낸 이용호 전 명지대 교수. 그는 난중일기 영인본을 펼쳐서 넣은 액자를 만들어 각계 지도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대전=지명훈 기자
4년간의 작업 끝에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번역본을 펴낸 이용호 전 명지대 교수. 그는 난중일기 영인본을 펼쳐서 넣은 액자를 만들어 각계 지도자들에게 보내고 있다. 대전=지명훈 기자
“각계의 리더들이 난중일기를 바라보며 국가와 민족을 우선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일해 줬으면 좋겠어요.”

대전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이용호(李瑢浩·70·문학박사) 전 명지대 교수가 4년간의 작업 끝에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번역본(800쪽)과 영인본(400쪽)을 펴냈다.

그는 영인본을 펼쳐서 넣은 액자를 만들어 행정자치부 장관과 대전시장, 충남도지사에게 보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도 보낼 계획이다.

“난중일기를 수십 번 읽으면서 충무공의 위대함은 치밀하고 뛰어난 전략보다는 법(군율)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지휘한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이 박사는 충무공과 동아일보가 불가분의 관계라며 난중일기를 동아일보 경영진에도 보냈다.

동아일보는 1931년 3월 충무공 묘위토(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경작하는 논밭)가 당시 덕수 이씨 종손(이종옥)의 부채 때문에 경매 위기에 처했다고 처음 보도했다.

또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1931년 6월∼1932년 4월·178회)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 2만여 명(400여 단체 포함)이 성금 1만6000원을 보내오자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발족돼 채무를 갚은 뒤 현충사 사당을 중건하고 묘소와 비각을 정비했다. 동아일보에 만평을 그리던 화백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은 충무공 영정을 그려 현충사에 봉안했다.

이 박사의 난중일기 부록에 실린 ‘민족적 지정(至情)의 결정(結晶)’ 등 당시 두 편의 동아일보 사설은 뜨거웠던 국민 성원을 이렇게 소개한다.

“…민족적 지정의 발견에 있어서는 상하를 묻지 아니하며 해내외(海內外)와 경향의 구별이 없었으며, 빈부의 이(異)가 없었다. 혹은 끼니를 굶어 (성금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의복을 팔고, 혹은 품을 팔아 보내는 이도 있으며….”

이 박사의 난중일기는 독백의 기록인 일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원문에 없는 인명과 지역을 밝힌 것이 특징. ‘충청수사가 왔다’는 ‘충청수사(신호·申浩)가 왔다’로 바꿨다. 또 음력을 그대로 두되 그레고리력으로 일일이 환산한 양력을 병기했다.

이 박사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선생께서 난중일기 한글판(번역판)을 펴낼 때 옆에서 도우며 난중일기와 인연을 맺었다”며 “수년 전 일본 학자들이 이순신 전적지를 현지답사하며 난중일기 일어판을 펴내는 것을 보고 더 훌륭한 난중일기를 남기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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