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범석]폭우속 ‘용필 오빠’ 살린 중년팬들

  • 입력 2005년 10월 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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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비옷 가져왔지?”

지난주 금요일(9월 30일) 오후 8시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호우주의보 속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양복을 입은 신사들, 핸드백을 들고 성장(盛裝)한 중년 부인들, 캐주얼 차림으로 온 여고 동창생 주부 등 4만여 명의 관객이 모였다. 주로 40대였으며 30대, 50대도 많았다.

형형색색의 비옷을 입은 채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아저씨 아줌마들은 원망스러운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수 조용필(趙容弼)의 ‘2005 필 앤드 피스’ 공연을 기다렸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됐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바람마저 거세게 몰아쳤다. 몇몇 관객은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지붕 밑 좌석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공연이 될까? 누가 봐도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8시 12분, 무대를 감싸고 있던 15m 높이의 흰 막이 내려지고 조용필이 ‘태양의 눈’을 부르며 등장하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들고 있던 관객들도 우산을 급히 접은 채 야광봉을 흔들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오빠”를 연호했다.

조용필이 “2년 전 바로 여기서 공연할 때도 비가 왔는데, 오늘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가 봅니다”라며 거듭 사과하자 관객들은 “괜찮아”라고 외쳤다. 조용필은 트레인을 타고 관객들 속으로 가서 함께 비를 맞으며 ‘허공’, ‘친구여’를 열창했다. 조용필은 비, 눈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앙코르 곡 5곡을 포함해 모두 31곡을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국민가수’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조용필은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정열과 진지함을 보여 주었다.

오후 10시 40분,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우리가 용필 오빠를 구했다”고 외쳤다. 10, 20대에게 문화 소비의 주체 자리를 내주고 ‘구세대’ 꼬리표를 달고 사는 이 시대 중년들. 하지만 이날만큼은 이들이 주인공이었다. 열정과 몰입이 10대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확인해 줬으며 문화의 현장에 생생히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조용필의 공연이 악천후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은 바로 그의 프로 근성과 관객들의 열정이 합쳐진 덕분이었다. 비바람도 중년들의 열광 앞에 위력을 잃고 만 날이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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