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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4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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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사태를 다룬 장편소설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의 작가 이성아(45) 씨가 펴낸 첫 소설집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저자가 회의하는 가치가 거시담론으로부터 결혼제도, 더 나아가 현대의 인간관계라는 미시담론으로 옮겨졌음을 느끼게 한다.
삶을, 꿈을, 사랑을 냉소하고 회의하면서도 때로 윤리나 편견,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앞은 절벽이고 뒤는 벼랑인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이중적 현대인들의 속성이 그가 다루는 주제다.
작품집 제목 ‘절정’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이야기들은 고요하며 조용하다. 한 마디로 ‘차분한 절정’ ‘차가운 절정’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차분한’ ‘차가운’은 제도나 ‘남의 눈’ 같은 구속이며, ‘절정’은 꿈 희망 사랑과 동의어다.
표제작 ‘절정’은 한 남자의 간병인으로 일하는 이혼녀가 주인공이다. 남자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도중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왔다. 신부는 골절만 있을 뿐 별 탈이 없지만 남자는 중상이다. 신부는 처음에는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다 마침내 남편을 떠난다.
심신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던 남자는 마침내, 간병인인 나에게 신부와 지냈던 순간들을 털어놓는다.
“어떤 날은 그 많던 여관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달린 날도 있었고, 여름날 땀으로 흥건한 몸을 미처 씻을 겨를도 없이 서로를 안은 날도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밋밋했던 결혼생활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온 자신 때문이 아니었는지 회의한다.
각자 이별의 고통으로 상처받은 남자와 간병인 여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고, 결국 서로의 몸을 확인하는 순간에까지 이른다. 그 쾌락의 정점의 순간에 여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누군가는 평생을 살아도 누리지 못하는 한순간, 바로 그 한순간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처럼 영원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절정의 순간에, 한 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듯 그윽해지던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저는 가슴 깊이 느꼈습니다. 바로 지금이, 이 사람의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그건 저로서도 예기치 못한 사고였지만, 어쩌면 그는 그런 죽음을 꿈꾸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지만, 사실 작가는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말하고 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그리하여 얼마나 희열에 찬 일인지를 말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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